효범스님은 부산 해운대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해운대라면 요즘 세계인들이 왁자하게 모여들어 불야성을 이루는 바닷가 휴양지다. 스님이 말씀하신 해운대에 위치한 \'부처님 마을\'을 찾아 나서자니 횟집이 즐비한 시장 건물을 비집고 들어서야만 한다. 산 것들이 어항에 갇혀 왁자하고 산 것이 산 것의 목을 내려치느라 식겁하고 채 죽지도 않은 것을 입에 넣고 씹느라 떠들썩한, 비릿하고 들큼하고 축축한 인간의 삶. 생생한 그것을 비집으며 시장 건물의 맨 꼭대기 층으로 오르고 오르니 \'부처님 마을\'이다.
효범스님은 12년 전에 이 포교당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지난 가을 해인사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이젠 법회를 하기 위해 틈틈이 다녀갈 뿐이다. 횟집이 가득한 시장 통 위에 있는 포교당이니 법당에 들어서도 길가의 차 소리와 사람들 북적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곳에 터를 잡는 게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세상에 부처님 가피력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작은 풀꽃에서부터 우담바라까지 부처님 숨결 아닌 것이 없어요. 난 불교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 내가 서 있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아래층엔 교회가 있고 바로 옆 건물에도 교회가 있고 코앞엔 천주교 건물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러니 처음엔 포교당을 이끌어 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시주를 받아서 세운 포교당이 아니었다. 속가의 돈으로 포교당을 세웠는데 신도가 오지 않으니 운명마저도 힘들어 한 3년간은 속가의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효범스님은 총무원 교육원에서 소임을 살았는데 그걸 마치고 내려와서부터는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서 스님이 거리에 직접 나가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것이 아주 조금씩 반응을 일으켰다. 천 장을 돌려서 한명이라도 신도가 늘어나면 감사했다. 그렇게 효범스님은 지금까지도 직접 홍보지를 돌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불모지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젠 이 작은 포교당에 일반 법회 때는 백여 명, 특별 법회 때는 천여 명의 신도들이 찾아든다. 그리고 효범스님의 뚜렷한 신념이 신도들을 더 반듯하고 강하게 만들면서 소문이 자자해진 것이 포교당에 활기를 더했다.
\"내가 스님으로써의 모습을 잘 지키는 것도 포교의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효범스님은 다른 포교당들이 눈앞의 현실에 매여 신도들의 비위를 맞춰선 안 될 것이라고 일침 하신다. 신도들의 비위를 맞출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신념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산에서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승복을 입고 시내에 나와서 포교를 할 때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물을 들이러 나온 것이지요. 내가 신도들이 요구하는 대로 속가의 물이 들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신도들이 근원을 상실하고 좌표가 다르면 효범스님은 가차 없이 잘라냈다. 몇 십 명의 신도가 나가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생에서 한 명만 구제하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급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여파로 신도들의 신앙심은 더 굳건해지고 주위에 소문이 나면서 찾아오는 신도들도 더 많아졌다. 효범스님의 신념이 만들어낸 일이다. 그러다보니 그 하나의 인연이 손을 펼쳐 포교당이 어느덧 다섯 개가 되었다. 해운대 부처님 마을, 거창 부처님마을, 장성 부처님마을, 중국 부처님마을, 부산 센텀 자성불선원신도회까지. 효범스님의 12년간의 열정이 이뤄낸 일이다. 그러다보니 주위의 사람들은 더 큰 포교당을 욕심내기도 하지만 스님은 크게 키우지 않겠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포교당은 남들 눈에 자랑스러워 보이는 곳이 아니라 늘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님들이 손을 잡아주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가는 거예요. 힘들고 외로우니까.\"
효범스님은 승복을 입음과 동시에 이웃의 손을 잡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생에서 성불을 놓치더라도 지금 구원을 바라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수행자라고 생각하신다.
\"꼭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사랑하는 줄 아나요. 눈빛만 보고도 바로 알아야지요. 중생들은 우리의 옷깃만 보고도 구원해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해서 준비가 안 됐다며 그 손을 모른 척 하는 게 말이 되나요. 부처님의 분신으로써 그 손을 잡아주는 게 당연하지요.\"
모르는 걸 아는 체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주고 둘을 배우면 둘을 나누며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 배워서 가르쳐주겠냐는 말씀이다. 어찌 스님이 구제되어야만 남을 구제할 수 있겠냐는 말씀이다. 혼자서 다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교만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이 부처님의 세상에서 손 잡고 함께 노닐어야 하지 않겠나 하신다.
\"세세생생 최후에 부처가 되더라도 현재엔 한 사람이라도 손 붙잡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행복하자는 거예요. 지금 행복해야 다음에도 행복하지 않겠어요?\"
스님은 늘 시주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따뜻한 옷과 밥을 내어준 중생들의 손을 어찌 잡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씀이다. 그래서 스님은 단 한 명이라도 스님을 찾으면 그에게 다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그렇기에 스님은 살기는 어려워도 마음은 풍요롭단다.
\"도심에 나와서 정말 고생 많이 했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보낸 12년 동안 정말 값진 수행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은 수도이고 그 법을 실천하는 것은 수행이다. 스님은 산에서 공부를 하고 내려와서 제도할 상대를 뚜렷이 알고 수행자로 보낸 12년의 시간이 인생에서 참 값진 시간이었단다.
지난 10월 효범스님은 이 모든 것을 놓고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열정을 바쳐 일으켜온 포교당을 손에서 놓고 큰 절에 들어가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학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줘서 더 큰 안목을 갖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과 세속의 삶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서 당신의 분신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관념 불교가 아닌 살아 있는 불교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이 어린 시절 강원에 있을 땐 그저 경전 공부만 했다. 그 울타리에 갇힌 스님들에게 철저히 실전을 가르치겠다는 게 효범스님의 생각이다.
\"내가 가르친 후학들이 다 포교를 할 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내 경험을 토대로 실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주면 그들에게 내가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분신이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여덟이 되면서 미래 불교가 점점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하신다. 그래서 효범스님은 일말의 여지없이 해인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문화재가 불교가 아니라 사람이 불교입니다. 사람을 키워야 부처를 키우는 거예요.\"
기독교는 청소년 교육에 힘을 쏟는데 왜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나 석굴암 같은 문화재만 껴안고 사느냐고 일침을 놓으신다. 해인사 대문 고치고 통도사 기왓장 올리는 거에 힘쓰면서 절집 부서지는 것에 안달하지 말란다. 미래는 팔만대장경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끄는 것이란 말씀이다. 그러니 불교가 사람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 다는 말씀이다. 큰 사람이 나오면 팔만대장경 같은 문화재나 해인사 같은 도량이 열 개도 만들어 질 수 있지만 인간이 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천 년 전의 것만 끌어안고 살게 된단다.
\"절집 문짝 붙들고 있는 건 죽은 귀신 붙잡고 있는 거예요. 미래가 아닌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 문짝 발로 차버리면 안팎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문 안에 들어가면 잘 나오질 않아요. 어렵더라도 교육을 해서 나오게 해야지요.\"
그래서 효범스님은 기력이 다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칠 생각이다. 그러다가 작은 토굴에서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게 스님의 간결하고도 오롯한 마음이다. 왁자한 시장 건물 그 옥상에 차려진 공중 도량을 거닐며 스님은 말씀하신다.
\"부처님을 만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정신적으로 빈곤하지 않아 갈증이 없으니 여유롭고 자유롭잖아요.\"
그 자유롭고 여유로운 옥상 도량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방이 십자가로 둘러싸인 도심은 여전히 왁자하다. 거기엔 웃음소리도 있고 악다구니도 있다. 그러니 효범스님도 여여히 그곳에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