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비정함을 넘어서는 것, 넘어서게 하는 것이 종교일진데, 그래서 종교는 인류사라는 이름 이래 존재해왔고, 지혜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경지로 지금도 수십억 인간들의 등불이 되고 있다. 종교 또한 때론 권력의 피비린내에 취해 있던 적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에 일본의 종교는 신천지를 개척하듯 조선을 유린했다.
최근 동국대출판부에서 펴낸 이치노헤 쇼코 스님의 <조선 침략 참회기-일본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나>라는 책을 보면 충격적이다. 일본의 종교계는 조선 전역에 800여 곳의 사찰과 포교소를 지었다. 경희궁을 비롯한 왕궁의 건물을 헐고 그 부재를 자신들의 사찰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의 동국대 정각원에는 ‘숭정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법당과 숭정전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조동종은 조선 정궁의 현판을 마치 전리품처럼 내걸었던 것이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엔 박문사가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초대 통감에 임명된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박문사의 흔적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당시 요사채로 쓰던 경복궁 준원전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호텔의 영빈관 파티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끌고와 이른바 ‘사죄법회’를 열었던 곳이 박문사였다. 치욕과 통한의 현장이다.
이 책의 지은이 이치헤노 스님은 말한다. “진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일본인들은 식민지배의 역사를 잊으려 합니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서도 과거 식민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역사에 무지한 채 지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바탕해서 현재와 미래가 있습니다. 과거의 일본불교와 조동종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지식으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신라호텔에 과거 이토 히로부미를 현창하는 박문사가 있었다는 사실, 동국대 만해광장에 과거 조동종 별원(조계사)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일 모두가 알아야만 합니다.”
아베 일본수상은 과거의 조선 침략을 부정하고 있다. 엄연한 사실을 교묘히 각색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책이다. 여름에 있을 선거에 우익의 지지를 얻으려는, 그래서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노리는 선거전술이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승리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아베 일본수상이 지금 그런 모습을 뻔뻔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한 때에 “진실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치헤노 스님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침묵이다. 당시를 살았던 이들은 모두 떠났다. 그래서 진실을 덮으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은 때론 진실을 호도한다. 그러나 기록이 있어 죽은 자는 침묵을 넘어선다.
19년 전 우리 종단은 당시 종정 서암스님에게 종정의 예우에 온당한 행위를 했던 것일까. 94년 4월 10일에 열린 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이란 초유의 결의가 있었다. 종정이 대중들에 의해 물러난 전례도 씁쓸하거니와 불신임할 만큼 종정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그해 3월 30일 중앙종회는 개혁그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현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의현 총무원장은 폭력배를 동원해 개혁그룹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개혁그룹도 이에 맞서 세를 결집했다. 의현스님의 3임에 반대했던 개혁그룹은 4. 10. 승려대회를 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켜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몰아냈다. 개혁회의 의장에 탄성스님을 선출하고, 서암 종정 불신임을 결의했다. 4월 26일 서암스님은 종정 사퇴와 함께 조계종단 탈퇴를 선언했다.
마침 서암스님의 회고록이 나왔다. 서암스님은 당시의 상황과 심경을 털어놓았다. 서암 종정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며, 당시 4.10. 승려대회 개최를 만류했다. 이것이 불신임에 이른 결정적 계기였다. 왜 승려대회를 반대했을까.
“개혁 그 자체를 반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세속적인 역사에서도 보아왔듯이 수단과 방법이 나쁘면 아무리 숭고한 목적도 퇴색되고 왜곡되기 쉬우며, 항차 종교에 있어서 폭력이란 종교 자체의 뿌리를 흔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이런 자기부정의 길을 가도록 방관할 종정이 어디 있겠는가.”
서암스님은 계속해서 “불교적인 방법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종정의 생각을 깨끗이 무시해버리고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모든 체제를 뒤집어엎어야겠다는 일부 스님과 신도들의 조급한 생각에는 따를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줄 아는 게 불가의 지혜다. 특히 정화불사의 후유증을 두고두고 앓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아온 나로서는 그런 후유증을 남기게 될 일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서암스님은 “서 원장이 퇴진해야 한다는 데는 당연히 동의했지만 불교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서 할 생각이었다. … 순리에 따라 물갈이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게 내가 종정에서 ‘쫓겨난’ 이유라면 이유이고, 개혁의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암스님은 이 책에서 종정에 추대되기 전 원로회의 의장 당시 불교개혁위원장으로서 두 차례에 걸쳐 개혁백서를 만들어 총무원과 중앙종회에 제출했다. 불교개혁위원회는 91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전국 승려대표자회의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개혁 요구는 번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암스님을 중심으로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이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서암스님은 회고록에서 “이 같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94년 3월 3일 원로 책임자회의를 열고 ‘서 원장이 3월 30일 종회에서 다시 총무원장으로 선출되더라도 이를 인준치 않는다’는 결의를 했다”고 밝혔다.
서암스님은 2003년 3월 29일 봉암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한 말씀 남기시라는 제자들의 거듭된 요청에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말씀을 남겼다. 올해 열반 10주기다. 서암스님은 94년 당시 승려대회를 만류하면서 ‘폭력의 악순환’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글로 남겼다. 당시 승려대회에서 서암 종정의 불신임을 이끌었던 스님들의 지금 생각은 무엇일까. 법의 상징인 종정을 불신임한 초유의 상황을 결정한 만큼 그 결정의 타당성을 지금 다시 검토해보아야 한다. 내년은 개혁종단 출범 20년이 되는 해이다. 내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지금부터 고민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