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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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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강원 강사 2013년 05월 375호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플라톤의 입적入寂과 더불어 Academy를 떠나야 할 상황에서, 때 마침 고대사의 위대한 왕중왕 알렉산더(당시 13세의 황태자, 기원전 343)의 스승이 되어달라는 부름을 받아 기꺼이 아테네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대의 왕권을 이어받은 알렉산더는 간단없는 군웅할거의 그리스 전체는 물론이고 이집트와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박트리아(대하국大夏國,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를 포함한 인도 북서부까지를 헬레니즘의 경계선으로 규정짓는 대제국 마케도니아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왕사王師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금의환향하였다. 자의든 타의든 권력의 비호를 받아 Academy를 능가하는 학당 Lyceum을 열게 되고, 플라톤의‘기하학적 열망’을 담은 Academy와는 달리 생물학을 중심으로 물리학, 심리학, 논리학, 역사학, 시학詩學 등에 자신의 철학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주지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코페르니쿠스(지동설), 갈릴레이와 뉴턴(고전물리학), 다윈(진화론), 프레게(현대논리학) 등
의‘새로운’학문이 생겨날 때까지 모든 서양학문의 효시를 이루어왔다. 무엇보다도 그의 형이상학은 중
세 아퀴나스 신학의 기틀이자 이념이 되어, 두려우리만치 존경받는 인물로서 호칭조차 이름 없이‘철학자(the Philosopher)’라면 곧 그를 지칭하였다.
‘누구나 천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All men by naturedesire to know).’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은 그렇게 문을 연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며 끝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독특한 생물종種임을 천명하는 말이다. 서양의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관찰하는 이성중심의 합리주의 사상의 뿌리를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합리주의는 우리가 매일같이 겪어내는 현상세계로부터
절연絶緣된 플라톤의 형상(Ideas, Forms, Universals) 세계를 허용할 만큼‘순수이성’적이지는 않다. 다르게 말하면, 보편(universals‘: 인간’,‘미美’)이 개체(individuals‘: 소크라테스’,‘비너스’)처럼 따로 실
재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경험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넘어 합리성을 결여한 관점이라고 비판되어 거부된다. 즉, 보편이란 개체처럼 실재하는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단순히 명칭(noun)에 불과하거나 기껏해야 비실재적인‘2차적’실체에 불과한 것으로, 보편과 개체는 구별은 되나 분리는 되지 않는다(distinguishable butnot separable)는 일원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나중에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흔히 보편논쟁이라 부르는 철학적 논쟁의 시발점이 된다.
현상세계에 속한 불완전한 소크라테스가 어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형상세계의 완전한‘인간’형상
혹은 이데아를 닮아 있는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이라고 부르는 개체-내-형상으로서의 보편자‘인간’이 곧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여느 그 무엇과도 구별되는 한 개체個體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보편자로서 인간종種이며 또한 포유류類임을 내재화시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 우리 세포 속의‘DNA-유전정보’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좀더 따라가 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들여다보면, 모든 개체는 혹은 존재자는 그 구성요소인 질료(matter)와 형상(form)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경우에도 묶어져 분리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개체를 인지하는 인식론적 내용은
항상 형상에 머문다고 한다. 진정으로 실재하여 개체를 만드는 것은 질료이지만, 순수 질료적인 측면에서의 개체는 결코 알려지지 않으며 기껏해야‘이것
(this)’혹은‘저것(that)’으로만 지칭되고 다른 어떤 성격도 보여줄 수가 없는 순수 존재론적 표상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존재는 직접적으로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된 여러 가지 형상(특성, 속성, 현상)을 통해 추출된 표상일 뿐이라는 철학적 언명인 셈이다.
어떤 점에서는 근대의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이 된 데카르트의‘cogito ergo sum’이 이미 예시되어 있는 느낌이다. 여러 가지 속성(형상)을 지닌 사물(질료)의 존재성을 추론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순 없지만, 인지 된 내용(형상) 외엔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이다. 공성이란 없다기보다는 그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스스로 무엇이라고 정체正體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질료적 개체는 본성이 공空인 것이며 연기緣起 속에서만, 관계 속에서만, 형상의 인식 속에서만 잠시나마 가성假性으로서의 자성이 얻어지는 중도적(in the processof becoming) 존재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더욱 다가앉아 들어보면, 삼라만상의 모든 개체는 중도적 존재이며 그 정의상 끊임
없이 변화하는 존재인데, 변화의 이면裏面에는 개체에 속한 형상의 발현 정도에 따른 현실태(actuality)와 가능태(potentiality)의 구별이 가로놓여 있다고 한다.
예컨대, 큰 바윗돌은 현실태로서 그저 이러저러한 모양을 가진 큰 바위로 현재 존재하지만 언제라도 대웅전 앞
석등이나 광화문 앞 이순신 석상이나 동구 밖 마을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역동적 가능태를 품고 있다가, 그 어느 하나라도 실현되면 새로운 현실태가 탄생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오직 현실태로만 존재하지만 현실태는 늘 내재적 가능성으로서 가능태을 품고 있으며, 그 가능태의 역동적 현실화가 곧 세계와 인간의‘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의 해결해야 할 핵심주제
였다.‘무엇이 왜 어떻게 변화를 일으키는가?’는 오래도록 그들을 괴롭혀 왔다. 만물불변을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도, 만물유전을 주장한 헤라클리투스의 사상도, 모두 변화에 대한 곤혹스런 입장 표명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는 가능태의 현현
일 뿐, 즉 형상의 변화일 뿐, 그 아래에 놓여 있는 질료적 개체 혹은 개체 자체는 불변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만물유전과 만물불변의 절충을 시도한 듯하다. 예
컨대, 어제의 가야산 중턱 큰 바위는 오늘의 해인사 대적광전 앞 석등이 되었지만 여전히 바위의 질료를 간직한 채 형상만 달리한 경우인 것이다. 변화 속의 불변이며, 부동不動의 동動인 것이다.
한편, 생명을 가진 개체들에 있어서도 현실태(올챙이, 도토리)로부터 가능태(개구리, 참나무)의 현실화가
이어지지만, 바위의 경우완 달리 오직 한 가지 가능태의 발현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올챙이가 반드시 개구리로 변화하지 닭이나 잉어로 변화하지는 결코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다른 구별을 가지고 온다. 우연적 속성과 본질적 속성이라는 형상의 질적 차이를 논한다. 사물이든 생명이든 모두 내재화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몇몇 속성은 단
지 시간이나 조건의 문제일 뿐 반드시 일정한 방향으로 가능태의 현실화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속성을 필연적(necessary) 혹은 본질적(essential) 속성이라 부르고, 그 실현과정을‘목적(telos, finalcause)을 향한 운동’이라고 설명한다.‘왜’변화하는가에 대한‘관찰적’ 합리화가 도입된 셈이다. 당시의 과학적 관찰기술 정도를 고려할 경우, 해든 달이든 혹은 도토리든 다람쥐든 저마다 일정하게 고정된 운동성향이나 성장 형태을 보이고 있으며, 또 그렇게 마치
목적을 가진 양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게 가장 그럴듯한 합리성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듯이, 오늘날까지도 사물과 생명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관찰은 여전하지만 관찰 뒤쪽에 놓인 변화에 관한 이론은 아주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비록 어제도 오늘도 해는 동에서 뜨고 서로 기울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바
뀐지 오래고 그 관찰조차도‘목적론’을 거스르고 갈릴레이와 뉴턴의‘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만유인력의 눈으로 보는 관찰인 것이다. 더구나 생명개체의 목적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당위는 다윈에 의해 빛을 잃는다.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목적론
을 부정하고 있으며, 생명에는 특정한 성장과 생존 방향이 본질적 속성으로 내재되어 있지는 않고 오히려 외재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우연한’적자생존의 방향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 게 생명의 특성이며 근본임을 주장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면, 뉴턴은 이미 아인스타인 이론과 하이젠버그의 비확정성원리에 의해 수정이 가해졌으며, 다윈은 분자생물학적 유전자 변이 기술 등에 의해 또한 수정되어 가고 있으며, 인간 삶의
가치와 의미는 변하지 않는‘본질적 인성’에 기댄다기 보다는 개성과 창의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는 다양성 속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견성성불을 위한 참나(본질)를“찾는(searching)” 노력은 어쩌면 스스로-원하는-나를“만들고자(creating)”하
는 노력보다 덜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이미 알려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