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무조건 반항하던 고교 시절, 부모님이 장롱 속에 깊이 넣어 둔 돈을 집어 들고 집을 나왔다. 집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던 항거가 가라앉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아무튼 나는 고향 남해의 부둣가에서 부산으로 가는 표를 끊었다. 때를 맞춘 것도 아닌데 그날이 초파일 전날이었다.
비교적 온건하고 양순하던 내가 뚜렷한 이유없이 반항으로 고개를 들고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마도 출가사문에의 길로 예정된 내 인생 항로에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부산으로 나아가는 배 안에서 한 스님을 만나 엉겁결에 그분을 따라 삼천포에서 내려 다솔사로 따라 들어갔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세상 밖이란 절집이었음이 분명했다.
나를 다솔사로 데리고 온 그 스님은 알고 보니 그 절 주지 스님이었는데, 그분은 나를 데려다 놓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는 덩그마니 혼자 남아 노스님 한 분과 지내게 되었다. 집에서 가지고 나온 돈을 주지 스님에게 빌려 주어 다시 밖으로 나올 노자도 없었거니와 그리 나오고 싶은 생각도 없이 절집 생활에 동화되었으니 피할 수 없는 사문의 팔자였다.
다솔사에서 고추 농사도 짓고 밭도 매고, 나무도 져 나르며 지냈다. 다도에 조예가 깊던 최범술 스남이 가끔씩 다솔사에 들러 머물곤 했는데, 그 때마다 다솔사 주변의 너른 차밭에 데리고 나가내게 차잎을 따서 말리는 법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화로를 피워 놓고 물을 끓여 차를 우려내어 미시는 법, 숨을 굽는 법까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무릎을 꿇고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분은 또 ‘원효대사 벌침수행장’, ‘천태사교의’를 가르쳐 내게 조금씩 불교에 눈을 뜨게 했다. 다솔사 곁에 펼쳐진 그 차밭의 푸르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보다도 훨씬 드넓은 불교에 귀를 열었기 때문이었을까. 다솔사에서 보낸 내 세상 밖의 살림살이는 청소년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세상에 대한 항명을 잠재우고 있었다.
뜰 앞에 있던 감나무가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늘어 뜨려 장대 들고 감을 따는 것으로 가을걷이를 마무리할 무렵, 주지 스님이 돌아왔다. 그분을 따라 나섰다가 그 해 겨울을 마곡사에서 보냈다. 그 곳에서의 대중살이 또한 고단했다. 양잿물을 재에 걸러 내려 빨래하던 시절, 지금처럼 더운물도 흔하지 않아 찬물에 걸레 빨아 청소하고 나면, 주지 스님이 손가락으로 창틀이며 마룻바닥 훔쳐보고 제대로 못했다고 고함을 질렀다. 어디 통상에 걸린 손뿐인가. 아침과 저녁나절 하루에 두 번 나무를 넉 짐씩 해야 했다.
나무를 넉 짐씩 해 나르던 마곡사에서의 그 겨울은 지금도 선명한 그림으로 떠오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디 푸르던 하늘, 아직 겨울이건만 봄을 채비하며 물오르는 나무들 사이로 잔솔가지를 긁으며 나는 부처님을 부르고 또 불렀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가 무엇 때문에 보장된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했는지, 그분이 고행 정진 끝에 찾아낸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의문을 낼 무렵이었다. 아무도 없는 겨울산에서 나는 그분을 애절하게 부름으로써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 열리리라 믿었다. 부르고 또 부른 만큼 그분에게 가까이 가리라 믿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아도 그리도 애절하게 부처님을 부른 적은 없던 것 같다. 때로 내가 수행자로서 느슨해짐을 느낄 때, 나는 그 겨울, 나무하며 부르던 석가모니 정근할 때를 떠올리며, 그 애절함으로 경건함으로 부처님을 찾던 그런 때가 한번 더 왔으면 하고 생각하곤 한다.
역마살이 끼어서 그랬는지 나는 행자시절을 담박에 끝내지 못하고 마곡사에서 겨울을 난 다음, 논산 관촉사로 갔다. 그 곳에서 진정으로 출가자로서의 발심을 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한 선승을 뵙게 된 때문이었다. 출가사문의 길에서 스승과 도반을 잘 만나는 것이 크나큰 복에 속하는 것은 그들로 인해 불법에 대한 눈이 바로 트이게 되기 때문인데, 관촉사에서 만난 제선스님은 내게 진정한 초발심을 내게 했고 사문으로서의 툴을 잡아준 분이었다.
관촉사의 제선스님은 깁고 기워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었으나 밖으로 풍기는 멋은 대단하였다. 나는 그분에게서 참선 법을 익히고 중의 기본 이념을 배웠다. 그분 곁에 있으면서 스님이 뿜어내는 멋이 참선의 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으며 , 출가자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고 진정한 벌침을 내게 한 제선스님은 그 뒤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여섯 해를 보내고 회향한 다음, 부처님 전에 삼배를 드리고 나간 뒤 혼적이 없다.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분을 변 적이 없는데, 살아계시다면 지금 세납 여든다섯이다.
관촉사에서 바로소 객스님들에게 들은 귀동냥으로 선방이며 강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강원이 있는 절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로 못 가고 있다가 나중엔 새벽에 도망쳐 해인사로 왔다. 그러나 해인사에서 방부를 받아주지 않아 한 달 동안 객실에 있으면서 새벽 세시만 되면 재무스님 방을 두드리며 ‘방부를 들이러 왔다고’ 스님을 괴롭혔고,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위협도 했다. 결국 산감 노릇을 석달 하고서야 행자방에 입방할 수 있었다. 부엌에서 일을 하며 다른 행자들과 함께 부지깽이로 목탁치고, 양재기로 종 치는 법을 배우고, 무 조각 하나 놓고 밥을 먹어도 꿀맛 같던 때가 엊그제 같다.
다른 사람과 견주어 조금 긴 행자시절을 끝내고 범어사 보제루에서 사미계를 받던 날은 이래저래 감회가 새로웠으나, 산감 노릇을 할 때 다천 허리로 여러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다. 계사 스님이신 동산스님 앞에서 호궤합장을 하고 있으려니 허리가 아파와 이마에 땀이 비오듯 했다. 곧 주저앉을 지경이었으나,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부처님 제자됨을 서약하는, 목숨을 내놓고 정진의 길을 가겠다는 장엄하디 장엄한 자리가 아니던가.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나를 어찌 동산스님이 보시고는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아가, 편히 앉거라.”
편히 앉으라는 동산스님의 따뜻한 말씀을 들으며 계를 받은 지 어언 강산이 몇 번 변해 내 나이 벌써 쉰줄이 넘어섰다. 그 동안 제방선원으로, 포교당으로 분주히 오갔건만 초발심을 내던 행자시절 때의 애절함이 절로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