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스님이 저를 멍청하다고 놀릴 때 사실 스님이 미워요.”
“하하하!!! 그런가? 꼭 그렇게 미워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럼 내가 얘기 하나를 해주어야겠군. 고통은 누가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있다고 하지. 누군가는 다른 이에게 잘못했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이 그로부터 피해를 받았어. 말하자면 한명은 분명히 잘못했고 다른 한명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그럼 이런 경우에 고통은 누가 받는 것일까?”
“그건 당연하게 잘못한 사람이 받아야 되는게 아닐까요? 스님이 말했잖아요.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요.”
“아니야. 꼭 그렇지가 않지. 삼세 인과를 따진다면 고통은 잘못한 사람이 받는 게 맞겠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과를 따른다면 이 고통은 잘못을 분별하는 사람이 받는 경우가 많아.”
“스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렇다면 내 미련했던 과거 경험을 하나 들려줄게. 예전에 학생 때 겪은 일이야. 내 친구 중의 하나는 사람들 등 뒤로 몰래 다가가서 그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확 집어넣고 놀래키는 걸 좋아했어. 사실 나는 누군가가 그런 급작스런 신체 접촉의 방식으로 나를 깜짝 놀래키는 걸 좋아하지 않아. 사실대로 말하자면 정말 싫어하지. 한두 번의 장난은 그럭저럭 넘길 수가 있었어. 그래서 친구에게 더 이상 그런 장난 하지 말아달라고 점잖게 부탁했지. 그럼에도 그것이 몇 번인가 반복되어 내가 정말 화가 난 경우가 있었어. 이미 주먹까지 쥐고 있어서 정말 그 친구를 패버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화가 나서 째려보고 있는 나를 두고 친구의 반응이 더욱 가관이었지. ‘어, 이러다가 사람 치겠네?’ 말하며 나를 비웃고는 그냥 가버리는 거야. 상대방이 그렇게 화가 났다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야 될 판에 외려 나를 비웃고 간 게 너무나도 기분이 나빴지.
그런데 그때부터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어. 잘못을 한건 분명히 저 친구인데 왜 괴로움은 내가 받는 것일까 하는 고민 말이야. 그 당시에 나는 인과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는데 이런 잘못과 괴로움은 내가 생각한 인과에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이었어. 상대방이 싫어하는 나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친구가 그 나쁜 결과를 받아야 했지만 그 상황에서 도리어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는 건 나였어. 그 일이 있은 후로도 그 친구는 나의 고민에 아랑곳없이 항상 즐겁고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고 지냈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었어. 왜 저 친구는 잘못을 해도 즐겁고 잘못 없는 나는 괴로운 것일까. 이런 잘못과 괴로움의 어긋나 보이는 인과 때문에 나는 그 며칠간 골머리를 앓았어.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정말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마음은 무슨 무너질 리 없는 벽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었지.
그렇게 며칠간 가슴앓이를 하다가 나의 고민이 불교 개론의 한줄 글귀를 보고 단번에 녹아내렸어. 그것은 사성제 중 고성제와 집성제에 관한 것이었어. 내용은 참 단순해. 고통이란 결과의 원인이 뭔지 알아? 그것은 바로 집착이야. 고통은 누가 잘못했고 안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집착이란 데서 비롯된다는 거지. 당시에 나는 친구가 큰 잘못을 했고 나는 잘못한 바가 없다는 시비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그 글귀를 보고 알게 된 거야. 시비라는 분별에 대한 집착. 이것이 바로 내 고통의 원인이었지. 그런데 이를 깨닫고 난 뒤에 정말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지. 며칠동안 나의 머리를 옥죄었던 꽉막힌 의문들이 한 순간에 해결되면서 머리뿐만 아닌 온 몸이 마치 허공처럼 텅 비어버리는 경험을 해본거야. 몸 전체로 불편했던 상황들이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 아무래도 그런 고통스런 경험을 직접 몸으로 오랜 시간동안 겪어봐서 이였는지 몰라도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란 사성제의 진리가 그 이후로 단순히 머리만이 아닌 내 몸으로도 녹아든 것 같았어. 잘 잊혀지지 않을 몸과 마음의 각인처럼 말이야.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거야. 네가 만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것이 반드시 외부의 대상 혹은 외부 세계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란 걸 알라는 거야. 고통의 대부분의 경우는 시비나 애증과 같은 분별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아. 내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옳고 남이 하는 생각 행동은 그르다는 시비심이 강할수록 그 고통은 정작 나에게 더 거세게 온다는 거지. 애증도 마찬가지여서 상대방이나 어떤 상황을 더욱 좋아하고 싫어할수록 그 분별로 인한 고통은 도리어 나에게로 향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네가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것이 사실상 네 마음의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거야.”
“네… 스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다면 분별은 항상 안좋은건가요?”
“아니야. 그렇지는 않지. 바른 분별은 언제나 필요한 거야.”
“무엇이 바른 분별인데요?”
“분별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분별을 바른 분별이라고 하지.”
“그게 말이 되는가요? 분별하지 않는데 분별이 나온다니요?”
“분별하는 마음을 완전히 떠난 상태에서는 또한 신기하게도 바른 분별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때의 분별은 사실 지혜라고 불러. 가리키는 게 같고 다만 그 이름이 다를 뿐이야. 지혜란 건 사실상 우리가 따로 얻어야 할 바른 이해나 안목 같은 게 아니야. 그건 그릇된 분별만 벗어나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 불교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진공과 묘유는 한데서 일어나고 있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도 마찬가지로 동시적인 모습이고 작용을 말하고 있어. 이 글귀들 역시 그릇된 분별을 여의면 자연히 무분별의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지….”
[위의 대화문은 인도네시아의 찜통같은 이코노미 전철 안에서 타미라는 동생과 나눈 대화의 일부분을 간추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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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圓帝 스님은 2006년 해인사로 출가 후 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2011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은사스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