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찾아가고자 하는 곳은 고리울에 있는 밀양 변씨 공장공파 선영이다. 그곳에 부평삼변이 묻혀 있다는 말을 들은 지는 오래 되었으나, 무거운 엉덩이 탓에 ‘언제 한번 가봐야지’, 말로만 뇌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엉덩이를 밀어대며 살랑대는 봄바람의 기운을 빌어 길을 나서기로 했다. 고리울을 가려면 7호선 까치울역에서 내려 5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인구가 얼추 100만에 가까운 부천시에 옛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게 참 정겹게 다가온다.
그런데 난데없이 부평삼변이라니? 부천에서 부평은 왜 찾고, 삼변은 또 뭐란 말인가?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부천시 고강동의 고리울마을이 행정구역상 옛날에는 부평군에 속했으며, 삼변은 천재라 불리던 변씨 삼형제를 가리킨다. 풀어서 설명하면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삼형제 모두 세상이 알아주는 천재라 해서 붙은 별칭이라는 말이다. 삼형제 중 가장 낯익은 이름을 들라면 변영로를 먼저 꼽을 수 있겠다. 중등교육을 받은 이치고 ‘아, 강낭콩 꽃보다도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붉은 그 마음 흘러라’로 시작하는 “논개”라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고강동은 부천에서도 외진 곳으로, 서민들이 오밀조밀 모여 사는 곳이다. 연립주택이 가득 들어찬 동네 뒷산에 밀양 변씨 선영이 있다. 선영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작은 안내판이, 오른쪽에는 변종인 신도비가 있고 왼쪽에는 변영로 기념비가 있음을 알려 준다.
공장공파의 시조가 되는 변종인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에 이른 뒤 훗날 공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도비의 마모가 심해 비문을 해독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지금은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해 놓고 있으며, 신도비 앞에 오석으로 신도비를 설명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 신도비 우측 방향으로 조금 언덕진 곳에 무덤이 있는데, 임금에게 시호를 받은 이답게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다른 석물들은 근자에 새로 설치한 듯하고, 무덤 양쪽에 세운 문관석(文官石)만은 오랜 풍상을 겪은 모습 그대로이다.
부평삼변의 무덤은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고, 변씨 문중의 다른 이들 무덤이 위와 옆으로 퍼져 있다. 삼형제의 무덤은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데, 왼쪽부터 맏형 변영만, 둘째 변영태, 막내 변영로의 순서로 되어 있다. 세 분 모두 무덤 옆에 행적을 기린 비석을 세워놓았고, 변영로의 무덤 앞에는 기념비가 따로 세워졌다. 기념비 앞 부분에는 변영로의 시 「생시에 못 뵈올 임을」의 일부를 새겨놓았고, 뒷면에는 일석 이희승이 그를 기리는 글을 김충현의 글씨로 담아놓았다.
이쯤에서 간단히 삼형제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변영만(1889~1954)은 스물도 되기 전에 대한제국의 법관양성소와 보성전문 법률과를 나와 판사가 되었다가 1908년 일제에 의해 사법권이 박탈되자 바로 판사직을 버렸다. 해방 후에는 헌법 제정에 참여하는 한편 반민특위 재판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법률가의 삶만으로 변영만을 평가할 수 없다. 그는 한문학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문학과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무엇보다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그는 일제 강점기 내내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혔으며, 해방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법무장관을 맡아 달라고 하자, 법무장관 말고 당신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둘째인 변영태(1892~1969)는 또 어떤가? 영문학자이자 외교관, 정치가로서 훗날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나 누구보다 청빈하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삶을 살았다. 뛰어난 고급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변영태는 한국어나 한문으로 된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여 논어를 영어로 번역하여 펴낸 바 있다. 비석에는 그가 1963년 민정 이양기에 대통령으로 출마할 때 만든 정민회라는 단체의 활동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10개 항으로 된 ‘우리들의 생활률’을 새겨 놓았다.
변영로(1897~1961)는 애주가로 이름을 날렸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함’을 뜻하는 말인 ‘명정(酩酊)’이라는 말을 빌려, 『명정 40년』이라는 수필집을 남기기도 한 변영로의 음주행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술에 취해 공동묘지 상석 위에서 눈을 덮고 자다 몸이 얼어 사람 다니는 길까지 굴러내려왔다는 등의 이야기가 지금도 심심찮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변영로가 술꾼이기만 했다면 그의 호를 따서 수주문학상을 만들고, 역곡에서 고강동에 이르는 길을 수주로라 이름 붙었을 리 없다. 변영로는 1918년에 영시 「코스모스 (Cosmos)」를 발표하여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간행했다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총독부에 의해 압수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무덤가는 죽음보다는 평온함과 한갓진 분위기가 여유롭게 펼쳐진 공간으로 다가온다. 둥글게 솟은 봉분을 타고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죽음의 음습함 대신 양지 바른 쉼터의 느낌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이끄는 덕분이다. 부평삼변이 잠든 고리울의 무덤을 둘러보는 일은 그래서 가벼운 나들이로 삼기에 맞춤하다. 봄볕 좋은 날, 막걸리 한 통 들고 가서 변영로의 무덤가에 뿌려주며 천재 삼형제가 끌고 온 삶의 궤적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져봄 직하다.
무덤을 둘러보고 내려오다 보니, 작은 공터에서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을 치고 있다. 부평삼변께서도 볼을 치는 경쾌한 소리를 듣고 계신가? 무덤 쪽을 돌아보는데, 하늘 위로 김포공항을 향해 비행기 한 대가 낮은 자세로 날아가는 게 눈에 들어온다. 푸른 강물 위로 붉은 꽃잎 이 떨어져 내리듯,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꽃잎 한 장 날려 보낼 것만 같은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