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을 쌓아 만든 눈부신 도량 노적사
북한산과 북한산의 절과 북한산 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북한산에 절을 세운 선지식들에게 기리는 마음으로 중앙승가대 불교사학연구소의 학인대표로서 나는 북한산성의 절을 답사할 계획을 세웠다. 산성 내에 있는 절로서 제법 잘 운영되고 있는 노적사와 중흥사, 태고사, 그리고 봉성암을 탐방하는 것이 이번 답사의 경로였다.
4월 13일 날씨가 참으로 맑은 날이었다. 김용택의 명시 「맑은 날」에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처럼 다사로운 봄날, 스님 여섯 분과 교수님 두 분이 함께 북한산성에 입성했다. 북한산 계곡은,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김용택 시인의 할머니처럼 세상을 떠나겠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아름다웠으며, 또한 세상 모든 이들의 죽음과 상관 있다는 듯이 처연(悽然)하기도 했다. 산성 내 사찰들을 위한 주차장에서 20여분 정도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노적사에 도착한다.
노적사에 들어서는 순간 노적봉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 우리는 실눈을 뜨고서야 노적봉 아래 살포시 둥지를 튼 노적사를 우러러볼 수 있었다.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또한 노적사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노적사의 힘일지도 모른다.
북한산에 올라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북한산은 상당히 험준하다. 그러다보니 너른 절터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노적사도 큰 절터는 아니다. 큰 절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말 적당한 크기로 노적봉과 맞은편에 있는 의상봉과 조화를 이루어 자리하고 있음에 나는 실로 장엄이란 단지 큰 것이 아니라 적절함에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지금 노적사에는 예전에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에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다. 네팔의 팔탄타쉬 사원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전수받아 법당 뒤에 사리탑을 세우고 법당을 적멸보궁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적멸보궁과 사리탑에 참배한 우리들은 노적사 주지스님을 뵙기로 했다.
노적사 주지스님이신 동인종후(東印宗厚) 스님은 1977년 노적사에 들어오신 이래 35년 동안 줄곧 노적사 복원불사에 헌신해오셨다. 먼저 학인스님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적멸보궁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네팔의 팔탄타쉬 사원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7과를 모셔왔습니다. 당시 그 사찰에 화재가 났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만은 불 속에서도 온전했다고 합니다. 때마침 저와 인연이 되어서 우리 절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종후스님이 처음 노적사에 올 때만 해도 노적사는 법당 12평에 삼성각 8평, 그리고 요사채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에 적멸보궁, 나한전, 삼성각, 요사채인 동인각, 범종각과 보림루(寶林樓)라 이름한 법고와 운판, 목어를 설치할 누각이 그리 넓지 않은 도량을 꽉 채우고 있다. 험준한 산자락이기 때문에 평지의 사찰에 비해 불사하려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길을 경운기를 통해 자재를 운반하면서 일군 불사이다.
우리는 신도회 임원들의 소개로 나한전과 산신각을 구경했다. 나한전의 500나한은 정말 한분 한분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개성 있는 모습이었다. 인도인의 용모를 잘 포착하여 빚어낸 장인의 솜씨가 놀라웠다. 손에 들고 있는 물건도 다양하다. 죽비를 들고 있는 분, 지팡이를 들고 있는 분, 불상을 들고 있는 분,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분도 있다. 더러는 졸기도 하고, 어떤 분은 옆을 보고 있다. 최태선 교수님의 안내로 우리는 각 나한상마다 다라니를 복장한 것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삼성각은 노적사의 또하나의 명물이다. 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바위 앞에 삼존불을 모시고, 그 위를 덮어서 동굴을 만든 후 그 속에 신성한 기운을 저장한 독특한 법당이었다. 입장하자마자 참 영험 있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위에 배어 있는 선선한 기운이 기도하는 불자들로 하여금 절하고 싶은 의지를 북돋아주는지, 절하는 불자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란다.
종후스님은 우리 학인들을 위해 노적사 및 북한산 안내책자와 조선 중후기 북한산성을 축조한 성능스님이 쓰신 북한지(北漢誌)를 한 권씩 나눠주셨다. 이 노적사도 1711년부터 1745년까지 중흥사 주지로서 승군 도총섭을 맡은 성능스님이 1712년에 창건하신 절이다.
성능스님은 경북 예천사람으로, 학가산에서 수행하다가 화엄사의 고승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문하에서 도를 이루었다. 성능스님은 북한산성의 수비를 지휘한 승군대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국의 중요한 불사를 일으킨 신심 깊은 스님으로 더 평가받아야 한다. 화엄사 각황전을 건립하였고, 통도사 사리탑을 중수하였으며, 중흥사와 태고사를 크게 중창하고, 용암사와 서암사, 진국사(현 노적사), 봉성암, 원효암을 창건하였다. 특히 북한산성의 사찰들은 모두 성능스님의 직간접적인 지원 아래 지어지거나 운영되었으니, 우리 불교사에서 성능스님은 각별히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조게종의 맥이 시작된 북한산성의 중심, 중흥사
험준한 북한산 자락에서는 큰 절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중흥사는 꽤 너른 절터를 자랑한다. 중흥사도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노적봉을 뒤로 하고, 앞과 왼쪽에는 중흥동 계곡의 아름다운 음악이 장엄한다. 북한산성 한복판의 가장 너른 공간에 있으니 가히 승군대장이 주석할 만한 공간이다. 주지스님이신 지홍스님은 중흥사의 위치를 연꽃의 연밥 부분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중흥사는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말 태고보우국사에 의해서 중창되었고, 다시 성능스님이 크게 중창하였다. 북한산지에 따르면 30여간에 불과한 중흥사가 북한산성을 축성한 후 중건되어 136간의 대찰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화재와 큰 홍수로 인해 멸실되고 말았으니, 불교계로서는 큰 보배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이후 뽕나무밭이 된 중흥사를 복원하기 위해 2001년 당시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께서 2년간 머무시면서 복원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열반하셨고,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던 불사를 종단 차원에서 재개하여 불광사 회주 지홍스님에 의해 대웅전과 요사채 1동이 건립되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멸실되기 전 중흥사 사진을 살펴보면, 대웅전, 전륜전, 삼성각(또는 산신각), 독성각, 선당, 만세루, 요사채 등 최소한 일곱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아직 현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대웅전과 요사채 한 동이 중흥사 너른 터를 지키고 있으나, 바야흐로 많은 불자들이 중흥사 일요법회에 참석하여 중흥사 복원에 뜻을 모으고 있어서 중흥사의 분위기는 포근하고 활발발하다.
중흥사를 나와 계곡 쪽으로 가면 천혜의 바위들이 중흥동 계곡을 내려오는 맑은 물에 부딪혀 맑고 밝은 법음을 들려준다. 맑고 밝은 법음은 햇살에 버무려져 점점이 수놓인 꽃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불심이 그리 돈독하지 않은 유생일지라도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중흥동에 한번 들어서니(一入中興洞)
일천 봉우리 분간키 어렵구나(千峰不可分)
암자가 어디 있느냐고 나무꾼에게 물어(孤庵問樵子)
무너진 성첩에 장군을 조문하노라(敗堞弔將軍)
옛 벽(壁)의 꽃들이 꽃비를 흩뿌리니(古壁花垂雨)
봄 연못의 기운이 구름을 토해내네(春潭氣吐雲)
산엔 또랑또랑하고 싱그런 들풀이 가득하여(漫山肥膩草)
걸음걸음마다 부처님 향기를 맡기에 바쁘구나(步步佛香聞)
중흥사 터에는 수많은 기왓조각들이 널려 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 조각조각에는 목탁 대신 정과 망치를 들거나 때로는 창과 칼을 들어야 했던 스님들의 호법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으리라. 조선후기 스님들이 북한산 방어를 맡았던 것은 호국보다는 호법이다. 호국을 담당함으로써 불법과 사찰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성능스님이 북한지를 마무리하면서 쓴 글을 보면 당신이 담당하셨던 산성 축조와 관리가 곧 호법행위였음이 확연해진다.
“천승(賤僧)이 외람되이 여러 상공들의 부름을 받아 산문의 본분을 내던지고 힘을 다하여 이 일에 바삐 노력해온 지가 벌써 30년이나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무거운 짐을 풀게 되어 옛 산중으로 돌아가려 한다.”
성능스님은 이처럼 자신의 본래 일은 곧 ‘산문의 본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산성을 지키는 일은 곧 그 본분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이 눈물겹게 지켜냈던 불법임을 우리는 새삼 자각해야 한다.
부도와 부도비로 우리의 본분을 생각하다
북한산성 안의 사찰에는 부도나 부도비가 별로 없다. 중흥사와 태고사 외에는 조선후기에 세워진 절이 많고, 조선 후기에 이곳에 주석한 스님들의 임무는 주로 산성을 축조하고 수도를 방위하는 일이었다. 덕 높은 스님들을 추앙하기 위한 부도나 부도비는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사에 원증국사 태고보우 스님의 부도탑(보물 제749호)과 부도비(보물 제611호)가 있는 것은 북한산의 자랑이다.
태고보우국사는 태고사에서 주석하시면서 중흥사 중창을 지휘하셨는데, 그때 지은 시가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이다.
내가 기거하는 이 암자 나도 모르긴 하나(吾住此庵吾莫識)
깊고 깊고 은밀하고 은밀하고 옹색함 없으니(深深密密無壅塞)
하늘과 땅 뒤덮어 가는 곳 따로 없어(函盖乾坤沒向背)
동서에도 남북에도 머무르지 않네(不住東西與南北)
구슬 누각과 백옥 전각도 비할 바 아니요(珠樓玉殿未爲對)
소림사의 풍습과 규정도 따르지 않고(少室風規亦不式)
팔만사천 번뇌의 문을 다 부수니(爍破八萬四千門)
저편 구름 밖 청산이 푸르구나(那邊雲外靑山碧)
중흥사가 자못 너른 뜰이라면 태고사는 그 중흥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며, 저 먼 첩첩산중을 아스라이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다. 「태고암가」의 첫머리처럼 아무런 걸림 없이 경계를 넘어버린 듯한 곳에 태고사는 새의 둥지처럼 조그마한 산 언억에 개방적으로 살포시 얹혀졌다. 팔만사천 번뇌를 깨부순 각자(覺者)에게는 아무런 걸림이 없는 이 암자의 풍수지리가 곧 깨달음의 경지였을 터, 그 경지가 이런 노래를 생산해냈을 것이다.
태고보우국사의 부도에는 이와 같은 스님의 기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조선시대의 부도가 알 모양의 소박한 모습이라면, 한층 한층 3층까지 차곡차곡 올린 후 맨 위에 지붕을 얹은 태고보우국사의 부도는 장중하면서도 세련되어 있다. 가히 팔만사천 번뇌의 문을 다 부순 선사의 기개가 네모진 기단에 의해 땅으로 굳건하고 날렵한 지붕에 의해 하늘로 드높다.
북한산성의 불교를 탐방하자면 봉성암의 성능대사 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단청은 없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처마로 장엄된 봉성암 대웅전을 지나 산위로 올라가면 성능대사 부도가 태고보우국사의 부도에 비해서는 소박하지만 제법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2단으로 올라가 몸체보다 큰 지붕이 비를 막아주는 형태이다. 태고보우국사의 부도탑에 비해 그 품격은 크게 떨어지지만, 그 기개만은 국사의 부도 못지않다. 주로 알 모양인 조선시대의 부도 형태가 아닌 탑 모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히 그렇고, 안으로 다지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밖으로 내뿜는 활달한 기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능대사의 진정한 꿈이 태고스님과 같은 선승이었으니, 그 꿈이 말년에나마 이루어졌을 터, 그의 생애를 형상화한 부도도 당신의 본보기인 선승의 기상을 담게 되었을 것이다.
중흥동 계곡이 부르는 부처님 노래
북한산은 이렇게 내게 단순한 등반 대상이 아닌 역사 탐방의 장소가 되었고, 더욱이 우리 불교가 오늘의 생명력을 유지케 된 원동력이 스민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우리의 선배 스님들이 목탁이나 죽비 대신 정이나 망치를 들고 산성을 다듬어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를 우리는 뼈에 사무치게 실감해야 하고, 그렇게 하여 보존되어온 부처님 도량을 금쪽같이 보존하고 양전옥답(良田沃畓)처럼 일구어야 할 것이다.
너무도 명백한 역사적 진실, 즉 태고보우국사로부터 이어진 북한산의 선맥을 성능대사가 지켜주었음을 확인한 우리는 선지식을 만나 환희로운 마음에 한결 무거워진 책임감을 얹어 하산하게 되었다. 하산하면서 옛 선비들이 여흥을 즐겼던 정자 산영루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산영루 옆에는 비석들이 즐비하다. 경리사 민영준의 공덕비가 두 개나 있었다. 경리사라면 북한산성을 관할했던 경리청(經理廳)의 수장이다.
관군이 담당하지 못한 수도방위와 산성축조를 스님들이 담당했다는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조선후기의 불교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라는 중요한 수도방위사령부를 담당함으로써 그 본연의 수행으로부터 멀어졌음에 분명하지만, 그것은 썩어가는 관군을 대신하여 백성을 지키는 보살행위였음에 명백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송두리째 뽑혀나갈 뻔한 불법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의 불교를 호국불교라 하지 않고 호법불교라 이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능대사가 호법신장이자 호법보살의 역할을 다하셨음에 크게 감사하고 찬탄해야 하리라.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중흥동 계곡은 오늘도 햇살과 바람과 바위와 돌과 모래와 자갈과 풀과 이끼와 물고기까지 동원하여 어떤 음악가도 흉내내지 못할 부처님 노래를 한시도 쉬지 않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