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수원 봉녕사 주지 자연 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정영 2013년 01월 371호

흰 눈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석탑 위에도 나무 위에도 흰 눈이 소복이 쌓였고 도량엔 새하얀 조등이 가득 달렸다. 한국 최초로 비구니 승가의 시대를 연 묘엄 스님이 열반에 드신지 일 년이 된 겨울이다. 상좌인 자연 스님은 묘엄 스님이 지내시던 빈 방에 고요히 앉아 계셨다.
\"절에서 흰 연꽃 한 송이를 받은 것이 묘엄 스님의 태몽이래요. 절집에 삼 년 상이란 건 없지만 모두 아쉬운 마음에 삼 년 간 조등을 달기로 했어요.\"
자연 스님은 목이 멘다. 묘엄 스님이 마치 출타하셨다가 돌아오실 것만 같다고, 그래서 지금도 곁에 계신 것만 같아 그립지도 않다고. 그런데 또 목이 멘다.
\"스님의 마지막 눈빛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그 순간 약속했어요. 스님은 늘 최고이셨으니 가신 후에도 최고로 모셔드리겠다고.\"
묘엄 스님이 임종하시는 순간, 모두가 스님의 법향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기획된 것이 \'세주묘엄박물관\'이다. 묘엄 스님의 추모 1주기에 맞춰 개원한 이 박물관은 여느 박물관과는 마음가짐도 매무새도 다르다. 스님이 머무시던 방 옆의 선방에 차려졌으니 생활공간 안에 자리한다는 게 우선 다르고, 당신 곁에 늘 머물던 스님들이 손 모아 마음 모아 차렸으니 그 여법한 생생함이 다르다.
\"늘 곁에서 어른으로 모시다가 박물관을 열기 위해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저도 우리 스님이 새롭더라고요. 이 사바세계에 이런 분이 오시기 위해서 청담 큰 스님의 몸을 빌었구나 싶대요. 그러니 그것은 파계가 아닌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비구니 역사가 없었을 테니까요.\"
박물관엔 묘엄 스님이 꽃으로 피어나 꽃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의 일생이 차려져 있다. 어머니의 편지를 들고 아버지인 청담 스님을 찾아간 이야기,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출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스님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메모들과 생활을 알 수 있는 소품들까지 모두 세세히 남겨져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함께 살고 있는 것만 같단다. 묘엄 스님의 유품을 보따리로 다락방에 올려두었다면 영원히 만날 수 없던 일이다.
\"좋은 물건이나 값나가는 물건은 없어요. 그저 스님의 법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귀한 물건들과 영상과 목소리가 있을 뿐입니다. 사실 이토록 값진 것이 또 어디 있겠어요.\"
묘엄 스님은 신도들이 주는 물건을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한지에 싸고 또 싸서 정성껏 보관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묘엄 스님 출가 당시에 성철 스님께서 써주신 계첩 \'영산정로 靈山正路\' 와 청담 스님께서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주신 \'명심銘心\'이다. 그것이 얼마나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던지 자연 스님은 보고 놀랐다. 그 안의 글귀들을, 그리고 큰 스님들의 마음을 얼마나 귀중히 하셨는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물관 개관 하루 전날 대중스님들이 먼저 관람을 했다. 묘엄 스님에 대해서 잘 모르던 스님들이 박물관을 보고 나와서 새삼 놀라워했다. 그리고 이번에 함께 출간된 묘엄 스님의 일생을 다룬 <한계를 넘어서>를 읽으며 스님들은 찬탄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 스님들에게 큰 공부가 됐다. 후학 양성에 힘쓰셨던 묘엄 스님의 성품에 맞게 차려진 1주기다.
\"사실은 이 도량 자체가 스님의 작품이에요. 가람을 배치하고 연못을 파고 전체를 아우르는 모든 것을 스님이 하셨어요. 이 도량의 나무와 꽃들 중에 우리 스님 손이 안 간 게 없어요. 그래서 올 봄에 이 꽃이 피면 같이 울고 또 저 꽃이 피면 같이 울었어요. 계절마다 가슴이 쩡쩡 울려요.\"
그러니 도량 자체가 \'묘엄세주박물관\'인 셈이다. 그래서 자연 스님은 큰 스님을 그리워하는 신도들한테 말씀하신다. 저 하늘의 구름이나 이 도량의 나무를 보면서 스님의 법향을 느끼면 된다고.
자연 스님이 묘엄 스님을 처음 뵌 것도 지금의 봉녕사에서다. 자연 스님은 대학교 3학년 시절의 어느 날 마치 학교 가듯이 집을 나와 부산에 계신 석암 큰 스님께 갔다. 그 절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출가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왜냐고 묻지도 않고 편지를 한 장 써주셨다. 그 편지를 들고 봉녕사 묘엄 스님께 가라고 하셨다.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 오면서 자꾸만 돌아가고 싶었단다.
\"산이 좋아서 출가했는데 산사도 아닌 도심의 초라한 길을 따르자니 돌아서고 싶었지요. 그런데 손에 큰 스님의 편지가 들려 있으니 거스를 수 있나요. 그런데 묘엄 스님을 뵙고 삼 배를 올리는 순간 숲을 생각하는 마음은 단숨에 달아나 버렸어요.\"
스님은 그 이후로 거의 묘엄 스님 곁에 있었다. 봉녕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강원을 다니고 소임을 살고 그 이후로 선방에 몇 년간 다닌 후로 다시 봉녕사에 들어와 묘엄 스님을 모셨다.
\"스님은 생전에 표정 변화가 없으셨어요. 싫고 좋은 얼굴도 말씀도 없이 늘 한결같으셨죠.\"
어려서부터 몸에 베인 성품이 아닌가 싶단다. 묘엄 스님이 윤필암에 계실 때 성철 스님이 역사와 교양, 학문과 세상의 이치, 불교의 근본 뜻을 가르치시고 청담 큰 스님은 수행자의 자질을 가르치셨단다. 그러나 그 또한 선근이 없으면 가르쳐도 가르침이 되지 않을 터. 묘엄 스님은 큰 스님들의 말씀을 들으며 학교 공부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게 낫겠다 싶어 출가를 결심했단다. 그렇게 공부하신 스님은 교육에 뜻을 두고 봉녕사에 승가대학과 율원을 개원해 교육의 요람으로 가꿔오셨다. 그런데 요즘은 출가자가 없어 자연 스님은 걱정이다.
\"단 한 명이 되더라도 그 한 명을 위해 최고의 교육을 할 것입니다. 묘엄 스님께서 한 평생 해 오신 일이니까요.
요즘 출가자들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나이도 많아서 스님은 내심 걱정이다. 옛날과 달리 학승이 많이 배출되지 이 시대부터 수행승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는 말씀이다. 옛날처럼 사상적으로 지도해줄 스님도 없을뿐더러, 예전과 달라진 환경 속에서 예전의 교육을 강요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론적으로라도 절집의 사상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늘 자연 스님은 스승인 묘엄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묘엄 스님은 항상 말씀하셨어요. 중은 시은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신도의 은혜를 생각하라고 늘 강조하셨다. 자연 스님은 출가하면서부터 들어온 그 말씀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산다. 그 이유로 강원을 졸업하고 소임을 살 때, 딱 한번 중노릇을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단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한 노 보살이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수지에서부터 비포장 길을 걸어오셨단다. 얼마나 꽁꽁 얼었는지 손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손으로 내려놓는 흰 쌀자루를 받으며 가슴이 막막했다. 이 쌀을 먹고 살아도 되나 싶었다.
\"우리 모친이 신심이 깊으셨어요. 좋은 것만 생기면 스님들께 갖다 드리는 걸 어린 나이에 보면서 스님들은 참 좋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내가 스님이 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스님과 눈 쌓인 도량을 거닐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다가 문득 또다시 묘엄 스님이 생각나셨는지 봄에 한 번 더 놀러오라신다. 꽃이 피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고, 전국 각지에서 묘엄 스님이 손수 가져와 심으신 꽃들이 향연을 이룬다고. 그러니 이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이 이제는 자연 스님의 몫이 아닐는지.
\"저는 우리 스님처럼은 못 해요. 여름에 풀이 자라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그냥 풀이랑 같이 살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마음이 볶이지 않아 편해지셨단다. 그 말은 마치 이렇게 들려왔다. 그리움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그냥 우리 스님이랑 살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 말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삶의 무늬를 그리며 맴돌았다. 미움이 도저히 감당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그냥 그 사람과 살기로 했어요. 이 세상엔 꽃도 있고 잡초도 있고, 또 그것들은 공존하니까.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지니까.
스님은 처음에 묘엄 스님께서 주지를 맡으라고 하셔서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러자 큰 스님은 집만 잘 지키면 된다고 스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셨단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큰 당부이기도 하기에 스님은 사명감을 갖고 주지 소임을 보고 있다.
\"인욕 정진으로 중노릇 회향하겠다고 스님께 약속 드렸어요. 대중을 모시고 산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우리 스님은 그렇게 50년을 사셨어요. 보통 인욕 보살이 아니지요. 그런 스님을 생각하다 보면 인욕이 되고 공부가 돼요.\"
자연 스님은 주지로 살면서 묘엄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널리 알릴 생각이다. 비구니계의 역사적인 인물인 만큼 후학들이 스님의 사상을 본받을 수 있도록 보편화 시키고 선양할 것이다. 도량을 잘 지키면서 묘엄 스님의 뜻한 바를 잘 이어가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그래서 자연 스님은 늘 대중 스님들께 말씀하신다. 스님들에게 있어서는 신심이 전부라고. 아무리 대학을 나오고 박사학위를 따고 법랍이 쌓여도 신심이 없으면 다 헛것이라고. 신심이 있어야 밑바탕에 내공이 쌓이고 그러 했을 때 승려의 표정이 나오는 것이라고. 박물관에서 묘엄 스님의 사진을 보며 말씀하셨더랬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