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해인총림이 결성되자 성철 노장이 총림의 방장으로 추대되시면서 나는 비로소 태백산에서 내려와 해인사로 들어왔다.
해인사로 와서 다음해 1968년 겨울 동안거 때부터 대중의 화합과 질서 유지를 관장하는 선방의 유나維那로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던 수좌들에게 “스님 밑에 3년만 있으면 저희들도 견성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힘 있게 정진했다.
당시 선방에 않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바윗덩어리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도 했고, 소뿔처럼 단단해 보인다고도 했다. 한번 가져다 놓으면 붙박이처럼 움직이지 않는 절구통 같다고도 해서, 이때부터 내 별명이 ‘절구통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인총림과의 인연은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해인사로 들어온 지 2년 만에 나는 김천 수도암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총림의 초기인지라 늘 사중이 소란했고 시비가 끊이지 않아 오롯이 정진하고 싶은 내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인사에 사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수도암으로 가서 조용히 정진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철 노장은 “그래도 여기서 유지하고 살아야지 떠나면 어쩌노?” 하시며 섭섭해하셨으나 끝내는 정진하기 위해 깊은 산중으로 떠나려는 나를 말리지 못했다. 1969년 겨울 동안거를 앞두고 수도암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수도암으로 가기 전 나는 출가 후 처음으로 상좌 넷을 맞아들였다. 성철 노장이 백련암에서 자신을 시봉하던 시자 두 사람 을 보냈고, 두 사람은 스스로 찾아왔다.
선방에 한번 앉으면 미동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발심한 수좌 하나가 찾아왔다. 통도사로 출가해 그곳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해인총림에 왔는데, 은사가 강원을 졸업하지 않고 선방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승적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스님께서 승적을 올려주십시오.”
마흔셋의 나는 찾아온 젊은 수좌를 받아들이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 도반하면서 살자.”
그렇게 해서 상좌를 맞게 되었으니 원각 다음 두 번째로 맞는 스물세 살의 상좌 원효였다. 원각이 일찍 명을 달리했으므로 원효가 맏시봉이 되었다.
상좌 원오는 성철 노장이 백련암에서 그를 내려 보내면서 “원오, 그 아이가 미련하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했는데, 칭찬에 결코 후하지 않은 노장에게 그러한 표현은 상당한 관심이었다. 어렸을 때 속가에서 한문을 익혔던 터라 한문에 밝아 강원에 다니고 있던 열여덟 살의 행자였다. 백련암에 올라갈 때마다 바쁘게 움직이면서 노장을 시봉하던 그를 보아온 나는 총기 있어 보이는 그 행자를 상좌로 맞으면서 말했다.
“성불하기 전엔 집으로 돌아갈 생각 마라!”
그리고 해인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아들인 상좌가 원인이었다.
태백산 토굴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 도움을 주었던 처사가 어린 아들 하나를 더리고 1969년 여름, 해인사로 나를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묵언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곁에 서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 몇 학년이냐?”
“6학년이에요.”
또래에 견주어 몸집이 작았으나 순백해 보였다.
“흠 그래? 학교 졸업하고 여기 와서 출가하거라.”
그 한마디가 인연이 되었는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보퉁이를 하나 들고 해인사로 나를 찾아왔다. 그 아이는 행자인 채로 나를 따라 수도암으로 갔다.
김천에 있는 수도암은 해발 1,137미터의 불령산 1,050미터 고지에 있어 겨울에 굉장히 추었다. 법당에는 둔 다기물이 꽁꽁 얼고, 기도하던 스님들이 동상을 입을 정도로 추운 곳이었다.
전국 선방 가운데 가장 추운 곳으로 사불산 대승사, 불령산 수도암, 오대산 상원사 세 곳이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히고 있으니 수도암의 추위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내가 사불산 대승사에서 살 때는 바람에 기왓장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다.
수도암에 들어오자 법당부터 정리했다. 칠성탱화, 신장탱화 등 여섯 개의 단이 있었던 것을 모두 정리해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만 모셔놓았다. 내가 불사하는 곳의 법당엔 부처님 한 분만 모셔져 있는 게 특징인데, 봉암사 결사 시절에 받은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법당에 모셔놓았던 16나한은 청암시에 잠시 맡겼다가 나중에 나한전을 새로 지어 모셨다.
수도암은 길도 나 있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 있어 생활하기에 불편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러 김천 시내에 가려면 20여리가 넘는 증산면까지 걸어가 차를 타야만 했다. 증산면에서 김천시내로 가는 길도 차량이 교행을 하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 겨울에 눈이 내려 중간에 버스가 멈출 때면 증산면까지 수십 리 길을 걸어 다녔다. 김천에서 장을 봐 가지고 오다가 짐꾼을 여남은 명 사서 물건을 짊어지게 오게 했는데, 그럴 때면 물건 값보다 짐꾼 삯이 더 들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나무를 해 쌓아놓았다가 군불을 때고 밥을 해 먹었다. 우물도 없어서 홈대를 연결해서 계곡물을 먹었는데, 그나마 겨울이 되면 얼어서 나오지 않았다. 수도암 위 정각암 땅속에서 나오는 물을 몇 양동이씩 떠다가 밥을 해 먹고 허드렛물을 썼으니, 편리한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는 요즘 절과 견주면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스님, PVC파이프를 묻어두면 겨울에도 얼지 않고 물을 끌어 쓸 수 있습니다.”
그 말대로 1미터 가까이 땅을 파서 PVC파이프를 묻었더니 물이 얼지 않고 잘 나왔다. 얼마나 반갑고 신기했던지 나도 상좌들도 흐뭇하게 웃은 적이 있다. 세상물이 들지 않고 조촐했던 수도암에 살면서 다시 정진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강원과 선방에 다녔던 상좌들은 방학 때가 되면 수도암으로 와서 함께 살다가 결제가 시작되면 떠났다. 도반 석주 스님의 사제인 법경 스님이 머물고 있기는 했으나 1년 중 절반은 홀로 지내면서 정진하고 농사를 지은 셈이다.
한해에 한 번 동지 때 들어오는 공양미 정도가 전부였을 만큼 신도들이 거의 없었고, 언제 어디에 있으나 자급자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나의 생활 철학대로 수도암에서도 약초를 재배해서 살림을 꾸렸다.
산나물을 뜯어 찬을 마련했고 당귀, 청궁, 백출, 황기 등의 약초를 심었다가 수확해서 약전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것으로 저희들의 학비를 대고 생활하는데 나를 도와 상좌들도 방학 때면 잣도 따고 콩 타작도 했다. 채소도 심고 약초도 거둬들였다.
일에 파묻혀 ‘이 일을 어떻게 다 하나’ 하는 생각에 골몰해 있는 상좌들을 데리고 나는 말없이 일했다. 하루 일과 그대로가 정진이던 나를 따라 일하고 정진했던 상좌들 또한 고생을 많이 했다.
열 번도 더 넘게 개울을 건너 거의 20여 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가야 차가 들어오는 마을이 나타났다. 상좌들은 신도들이 수도암에 올 때면 마을 입구에 부려놓고 온 쌀이며 부식을 져 날랐다. 아침 공양을 하고 나서 지게를 지고 내려가서 한 짐 지고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내려갔는데, 그렇게 하루 두 번 왕복하면 한 밤중이었다. 겨울엔 별을 보고 내려갔다가 별을 보고 올라왔을 만큼 먼 거리를 걸어 물건을 져 날랐다.
쟁여놓은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는 것은 수도암에 사는 사람이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내가 수도암 벽에 나무를 일정하게 잘라 재어놓으면 마치 두부모를 잘라놓은 것처럼 반듯했다. 그런 장작더미를 바라보면서 상좌 하나가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스님, 저게 보기는 좋지만 혹여 불이라도 나면 큰일 아닙니까? 재놓지 말고 때십시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기 2557(2013)년 《누구 없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