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강원에 입방한 후 봄산철과 하안거를 지나서 깊어가는 시린 겨울 밤하늘에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씩 어둠을 밝히고, 앙상한 가지 사이로 떨어져나간 나뭇잎은 바람을 따라 자취를 감추어간다.두 뺨으로 지나는 가야산의 날카로운 적막은 상심한 마음 마냥 슬퍼하며 하루하루 쫓겨 갔고, 새들은 토해내지 못한 지난여름의 통증을 안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떠나갔다. 사라져간 옛 절터 서까래의 밑단만이 고요히 말이 없으며, 처마 밑 풍경소리는 바람사이로 쉬이 흩어져간다. 누구하나 내 마음 같지 않아 그저 머리를 숙이고 스스로의 마음을 눌러본다. 차디찬 법당 앞에 앉아 밑으로 녹아 흐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생각들이 사그라지기를 바라지만, 근심을 삼키에는 너무 뜨겁고 슬픔을 즐기기에는 날씨마저 스산하다. 기다림에, 외로움에 무너져 가는 것 같아 목 끝이 메어온다.
그저 내가 부족하고, 부족한 것을 탓 하는 건 아닌지 부끄러움이 앞을 가린다. 뜨겁게 타오르는 한 생각으로 몸서리치던 22살의 조무래기는 어느 새 잊혀지고, 오로지 선택의 잔재만이 남아 나를 메어 있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경험만이 지금의 시간을 대변해 줄 거라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한편으로는 그 경험이 나를 죽이고 있는 것만 같다. 안으로 안으로 완전히 썩어야만 새싹이 돋울 수 있으니 그렇게도 지내보라는 지도법사스님 말씀이 조심스럽게 나를 다독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엇을 위했는지 잊혀져버렸고, 배낭여행을 하며 만났던 그들과 그네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기꺼이 세상의 밑받침이 되겠다고 다짐한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먹먹함이랄까….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이 욕심으로부터 시작한 탓일까? 욕심과 작위로 짓눌러진 지금의 생활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무겁다. 하심을 배우지만 상심만 늘어가며, 인욕이 나를 강하게 한다지만, 치욕만이 견디게 할 뿐이다. 단지, 시간만이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이 견고해져 간다. 어쩌면 마음을 내어 놓고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쉬이 속마음을 보이면 안 된다는 충고와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다소 냉소적인 구절이 뇌리를 스친다. 드러내고 비워내어, 떨쳐버려야 할 지금 이 시기에 복잡함과 답답함이 나를 가두는 것 같아 한 숨 짓는다. 누가 이런 삶을 살라고 간곡히 부탁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했고, 선택했으며, 행동했다. 선택에 뒤따르는 의도치 않은 문제들까지도 짊어져야한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 달게 받아 들어야 할 것을 아직은 풋내기라 그런지 쓰게만 느껴진다. “괜찮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 는 말은 생각을 이겨내고 지금 이 순간을 감내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드리는 나 같은 초심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 할지 모르겠다. 삿된 생각일랑 잠시 쉬고 군더더기 없이 모두 비워내어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수행자가 되는 그날을 그려보며 오늘도 절뚝거리며 가야할 길 향해 발을 내딛어본다.
11월, 겨울바다처럼 차가워진 새벽하늘에 수놓인 별빛 한 조각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