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불어오는 솔바람 향기가 장경판전의 청량한 풍경소리와 함께 가슴과
머리를 한없이 맑게 해 주는 어느 오후. 엄마와 딸이 판전의 마당을 거닐면서 서로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엄마가 딸에게 말한다. “이 위로는 새들도 못 날아다닌다.” 딸이 “왜 높아서 그래?” 하니까 엄마는 “아니야 그만큼 유명 한 거야.”
우리 민족은 이들 모녀의 대화에서처럼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에 대하여 그 위로는 새들도 날아다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신비롭고 신성시 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부부가 딸 아들과 함께 장경판전 마당을 돌며 대장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딸이 엄마에게 일재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왜 대장경을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엄마는 조금 생각 하드니 무거워서 못 가져 같다고 대답한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필자는 기가 막혀서 “보살님, 금방 따님에게 한 말은 지어낸 거지요?” 엄마는 능청스럽게도 “맞아요. 그럼 뭐라고 하나요?” 그러자 남편이 부인에게 “거봐 당신이 틀린 거야.” 재미있고 단란한 가족.
우리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왜 대장경을 가져가지 않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재시대에 일본인들이 대장경을 일본으로 반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도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하고 보관하기 어려운 대장경을 굳이 일본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설과 가져가 봐야 기술 부족으로 한국에서처럼 보존 할 수 없기 때문에 못 가져갔다는 설, 가져가려고 하였으나 해인사 스님들과 지역주민들이 사력을 다하여 막았기 때문에 못 가져갔다는 설 등이 있다. 어쨌던, 가져가고 싶었으나 못 가져 간 것이다.
불교를 숭상하며 침략적이고 욕심 많은 일본이 우리의 이 찬란한 문화재를 못 가져 간 것은 전란과 화재 등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에 관한 또 다른 신비스러운 이야기의 하나가 될 수 있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옛날, 상 노장 스님들보다 더 웃데, 그 상 노장스님들 보다도 더 더 더 웃데 의 상 노장 스님들로부터 장경판전의 팔만대장경 관람에 대하여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옛날에는 평소에 장경판전 개방을 하지 않고 춘분과 추분에만 개방 하였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팔만대장경을 볼려며는 1주일 전에 미리 와서 법당에서 1주일 간 용맹정진 기도를 하고 춘분 추분 때 장경판전으로 들어오는데 오후 3시경에 그려지는 수다라장의 연꽃을 밟아보고 들어오는 것을 큰 복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날씨가 흐려서 연꽃을 볼 수가 없게 되면 나는 복이 없어서 연꽃을 밟아 보지도 못하는 구나, 하면서 탄식을 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인류의 문화유산이며 고려시대 국난의 시기에 부처님의 불력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민족이 하나로 뭉쳐서 이룩한 호국정신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시고 있는 신성한 성지다.
상 노장 스님들께서 전해주시는 말씀처럼 옛날에는 팔만대장경을 그렇게 경건하고 엄중하게 보존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처럼 엄정한 관람규정이 없는 상태다. 문화재 탐방이나 관광목적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 존엄한 성지에서 잡담을 하며 함부로 떠들고 장난을 하는 사람, 뾰족한 등산지팡이로 마당을 찍고 다니는 사람, 침을 밷기도 하는 사람, 합장의 예를 올리지도 않는 사람 등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때마다 민족의 성지가 경시당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낀다.
보존관리 형태도 국가 차원의 엄중한 매뉴얼과 일관성 없이 땜질식의 임기응변적이다. 소방관서의 정기 점검과는 달리 경찰서 등 경비전문기관의 자문 없는 주먹구구식 경비와 1년 단위 계약 같은 경비원 처우문제, 보수 공사 시 창건당시의 원형대로 정밀하게 복구 관리 되지를 못하고 있는 기술상의 문제 등이 그 사례이다. 민족정신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소란과 무질서가 없는 경건하고 정숙한 분위기의 관람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 선진국의 국가 중요문화재 관리 형태에 비하면 우리의 수준은 아직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