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노장에게 인가를 받은 다음 태백산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렀다. 태백산으로 가기 전 총림으로 가서 대중들과 함께 살 것인가, 중생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다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농사를 지어 생활하기로 했던 것이다.
옛 스님들이 득력을 하거나 도를 이룬 이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를 하면서 보림保任을 한 것처럼, 홀로 묵묵히 공부를 다진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자신 있었고 장작을 젊어지고 다녀도 그야말로 생기가 넘쳤다. 누가 와서 칭찬을 해도, 욕을 해도 전혀 동요함이 없었다. 태백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눈앞에서 어떤 청천벽력이 일어나도 전혀 까딱하지 않고 살아왔다. 태백산에 서의 10년 세월은 세상에서 물러나 깊이 침잠한 것이었으나 내면은 말할 수없는 생동감으로 살아 숨 쉬던 대자유인의 시절이었다.
태백산으로 들어간 초기에는 조선시대의 도인인 사명 대사가 머물며 정진했던 홍제사에서 도반 석주石柱 스님과 함께 살았었다. 1958년 여름이었다. 인홍 스님이 상좌들을 비롯해 대중들과 함께 한 회상을 이루고 살다가 울산 석남사로 떠나자 비어 있던 홍제사로 들어간 것이다. 그해 여름 홍제사 곁의 자두나무에 자두가 얼마나 탐스럽게 열렸던지 한 양동이씩 따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김룡사 금선대에서 정진하고 있던 서암 스님, 홍제사 위에 있는 도솔암에서 정진하던 일타 스님, 그리고 전국 여러 선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지유 스님을 불렀다.
“우리, 따로 살지 말고 함께 모여 정진하며 삽시다.”
이렇게 내가 주선해서 다섯 비구가 모였다.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10년 동안 내가 유일하게 여러 대중과 함께 보낸 시기였다.
서암 스님만 나보다 8년 연장이고 나머지 스님들과는 거의 같은 연배였다. 다섯 사람은 입선과 방선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자유롭게 정진했다. 한쪽에서는 좌선, 다른 한쪽에서는 포행을 하는 식이었다. 구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도 철저한 자기 규율과 정진이 있었다.
소탈한 성품에 우스갯소리를 잘했던 서암 스님은 나이가 제일 연장이라 하여 소임을 맡기지 않았는데도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더덕이나 나물을 캐 와서 맛있게 무쳐 밥상에 놓기도 했다. 서암 스님은 홍제사에 오기 전에 원적사, 봉암사 백운남 등지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마음을 나누었던 막연한 선배 도반이었다.
어느 날 태백산 상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비가 와서 계곡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다섯 비구는 모두 옷을 벗어 장대에 묶어 어깨에 멘 채 개울을 건넌 적이 있다. 어느 때인가는 무더운 한여름에 함께 산길을 걷는데 서암 스님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 더우니까 모두 벗고 가지 뭐” 하셔서 밤새 시원하게 걸어간 일도 있었다. 그만큼 격의가 없는 분이셨다.
훗날 서암 스님은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거쳐 성철 노장께 서 입적하신 뒤로 일흔일곱의 연세에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그만큼 제방의 수좌들에게 선망이 두터웠던 분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많이 아는 것은 귀한 것이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다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이 갖는 것은 부한 것이나 그보다 더 부한 것은 하나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이기는 것은 용기 있는 것이나 그보다 더 큰 용기는 남에게 져주는 것입니다.” 했던 분이다. 도반이 적은 나에게 서암 스님은 마음을 가장 많이 나는 도반이었다.
일타 스님은 손님을 보살피는 지객과 법당의 예불을 전담하는 부전을 맡았다. 나보다 네 살 밑으로, 태백산에서 처음 만나 도반이 되었는데, 변재辯才가 좋고 염불을 잘해서 두 가지 소임을 보게 된 것이다.
일타 스님은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 배씩 7일 동안 기도를 한 다음 오른손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모두 연비燃臂하고 태백산 도솔암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스님은 “《능엄경》을 일고 난 뒤로 중노릇 잘하고, 숙세의 업장을 녹이며, 부처님 법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세 가지 서원을 세우고 연비를 했다.”고한다.
《능엄경》에는 연비의 공덕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입멸한 후에 어떤 비구가 발심하여 손가락을 태우면, 그 사람은 무시 이래로 묵은 빚을 일시에 갚아버리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다.”
일타 스님은 그 대목에서 신심을 내어 “허공과 같은 법신 자리에 절하옵고 평등한 일심으로 간절히 임합니다. 오직 가피를 드리우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주소서”라는 발원문을 짓고서,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기름을 먹여 태우는데 아주 잘 타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연비는 본디, 출가자나 재가자들이 계를 받을 때 향이나 심지로 팔을 살짝 태우는 의례다. 일타 스님은 연비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그때 몸이 한낱 기름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타 스님은 철저하게 중노릇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연비를 했던 것이다. 훗날, 말뚝 신심을 낸 한 젊은 수좌가 찾아와 막무가내로 연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 일타 스님이 정색을 하고 충고했다.
“잠깐 신심을 내어 연비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평생을 연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오히려 진전한 연비다.”
그렇듯 일생을 연비하는 마음으로 산 수행자였다. 일가족 40여명이 출가한 신심 깊은 집안의 일타 스님은 훗날, 자운 스님과 함께 한국 불교의 율장 확립에 큰 역할을 했고, 해인총림의 율주, 조계종 단일계단 전계대화상, 조계종 원로회의 위원을 지냈다.
성철 노장께서 입적하자 나는 해인사에 함께 머물던 일타 스님과 혜암 스님을 찾아 “원로인 우리가 합심해서 총림을 이끌어 나가자”고 했을 정도로, 오랫동안 해인사에 함께 있으면서 총림을 이끌었다. 노장이 살아계실 때도 산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혜암이, 법전이, 일타 오라캐라” 하시며 우리를 찾으셨다.
지유 스님은 공양주 소임을 맡았다. 일본에서 출생해서 성장했던 지유 스님은 광복 후 귀국해 범어사 동산 스님을 은사로 입사, 출가한지 10년이 채 안 되었는데, 원적사에서 용맹정진으로 힘을 얻고는 홍제사로 왔던 것이다. 전국의 여러 선원과 토굴에서 수행정진하며 운수납자의 삶을 살다가 봉암사 주지를 거쳐 현재 범어사 조실로 있다.
석주 스님은 공양간 채공을 맡았다. 나와는 원적사와 갑장사, 그리고 묘적암에서 함께 정진하다가 다시 만나 공부하게 된 것이다. 석주 스님은 인곡 스님의 상좌로 평소 토굴로만 오가면서 정진하다가 지리산 영원사를 중창 불사했다. 지금까지 내왕하고 있는 유일한 도반이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석주 스님과 그이 사제 법경, 그리고 행자 한 사람과 산 적도 있다.
부목 소임은 내 차지였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무하는 것을 좋아해서 부목을 자청한 것이다. 나무하는 것이 취미일 정도로 한평생 나무를 하면서 살았던 나였다. 생나무는 잘 베지 않았다. 썩지 않고 곧은 것은 쟁여 놓고 찌꺼기만 모아서 땠기 때문에 다음에 와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새 장작을 땔 수 있었다.
나무를 해다가 톱질해서 담 밑에 쌓아두었기 때문에 홍제사 울밑엔 항상 깔끔하게 장작더미가 쟁여져 있었다. 지금도 안성 석남사에 사는 정무 스님이 그곳 홍제사에 4년을 살았는데, 내가 쌓아두고 온 나무를 다 때지 못하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출가의 길에서 한 길을 가는 도반만큼 든든한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가장 외로운 일은 마음이 통하는 도반이 없는 것이다. 홍제사에서의 다섯 도반들의 모습은 곁에서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로 조화롭게 정진하고 있었다. 도솔암에 살던 비구니 장일 스님(전 동화사 내원암 주지)과 지금 경주의 한 절에 살고 있는 지택 스님이 가끔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전도 부쳐주곤 했다. 그들은 조화를 이루며 재미있게 살고 있는 30, 40대의 다섯 비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올라가곤 했다.
도반들과 함께 서로 경책하고 탁마하면서 정진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음력 2월, 때 아닌 눈이 한없이 내리고 난 뒤였다. 홍제사 백호등에 서서 첩첩한 앞산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이렇게 읊었다.
내가 묵묵하고 말 없는 너에게 묻고자한다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지었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에 희어버렸더라
묘적암에서도 저절로 시가 나왔으니 50여 수가 되었고 그것을 ‘삼악노인三惡老人의 시’라고 이름을 붙였다. 삼악三惡은 탐貪 ⦁ 진瞋 ⦁ 치痴 를 말한다.
《누구 없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