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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행복, 불교의 정치적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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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편집실 2012년 10월 368호

종교는 인간을 해복하게 해주는가. 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될 것이다.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종교라면 일찌감치 인류사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을 것이다. 종교와 행복, 이 둘의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일까. 일찍이 이런 연구가 있었으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구가 긍정심리학의 두 흐름(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대표적인 학자인 에드 디너 연구팀이라고 한다. 연구팀은 세계적 규모의 설문을 통해 종교를 갖는 게 행복(주관적 안녕감)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에드 연구팀은 이어 종교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종교계를 떠나냐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일수록 사람들의 종교 일탈 현상은 두드러진다고 보았다. 연구팀이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종교가 행복에 직접적으로 행복의 원인이 되는 게 아니라, 종교활동이 사회적 지지감, 존중감,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하고, 이를 통해 행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둘째,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어려운 나라에서는 종교와 행복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는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사이에 행복감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셋째, 행복과 종교의 관계는 문화적으로 종교적인 사회에서만 나타났다. 문화적으로 비종교적인 지역에서 종교와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는 미약했다. 이 연구는 세계적 규모의 설문으로 바탕 한 만큼 특정사회의 현상을 세밀히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참고사항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근래 종교는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여러 이름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전쟁이라는 잔혹행위에는 종교가 원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수백 년에 걸쳐 유럽과 서아시아를 살육에 빠뜨린 십자군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살해한 아메리카 정복의 잔혹사에도 백인우월주의와 종교가 첨병을 했다. 엄밀히 말한다면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악용한 제국주의적 침략사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미국의 종교학자 찰스 킴볼은 일본의 옴 진리교, 9.11테러를 비롯한 종교의 이름 또는 종교가 관여한 사건들을 분석한 <종교가 사악해질 때>라는 저서를 통해 자기들만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거나, 맹목적인 복종,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 종교가 사악해지는 징후라고 파악했다. 찰스 킴볼의 견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사악해지는 종교를 마주하고 있다. 찰스 킴볼은 많은 종교적 전통 속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서 ‘다양성의 포용’에서 길을 찾고 있다.

종교는 인간을 궁극의 가르침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사회의 여타 제도와 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정치와 행정 등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권력관계를 규정하는 매우 현실적인 분야라면, 예술은 인간의 감성에 작용한다. 교육과 사회복지 등은 사회의 연속적인 유지와 구제에 기여한다. 모두 현실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다. 종교도 현실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에 기반한다. 지금 우리를 규정짓는 현실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끝끝내 잊지 않고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를 종교는 지향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여전히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주는 지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종교를 실현하는 주체인 종교인과 종교단체는 때로 애초의 종교와 멀리 떨어져 있다. 종교를 실현하는 주체가 집단화되면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발생한다. 교리의 해석과 소임의 분배가 이뤄져야 하며, 이는 집단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다. 종교 내에 절대적 권위자가 옹호되고 의사결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권위가 흔들리거나 운영시스템이 현실과 어긋나면 혼란이 일어난다.

종교에서 작동되는 정치는 사회현실 정치와는 다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정치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 인간은 전적으로 두 개의 정치해석 사이에서 방황하여 왔다”면서 “그중 하나의 해석에 따르면 정치는 투쟁이고 전투이다. 즉 권력을 장악한 자는 권력에 의해서 사회에서 그들의 지배를 보장하고 이익을 얻어낸다.” 대체로 현실의 정치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는 곧 권력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투쟁으로써 획득된 권력은 배타적으로 행사되곤 하며, 이런 행태가 때론 폭력적으로 표출되더라도 승자의 특권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모리스는 정치의 두 번째 해석을 “정치는 질서와 정의를 이행하려는 노력이고 거기에서의 권력은 사적인 이익의 압력에 대항하여 일반의 이익과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이라면서, 나아가 추구되어야 할 정치는 ‘통합의 정치’라고 주장한다.

종교집단 내에도 정치가 불가피하다면, 종교의 정치는 깨달음을 향한 장치이어야 한다. 불교는 그 모델을 갈마라는 의사결정의 방식과 절차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일정 자격을 갖춘 구성원이 모두 참석해 사안에 따라 세 번까지 의사를 물어 결정했다. 기본적으로 세속의 영리를 축하지 않는 수행자집단이라는 특성이 있었으며, 숫적으로도 직접 대면해 의사를 전달할 정도의 규모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붓다 당시의 방식이 지금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적용 불가능한 것은 절대 아니다. 수행자집단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커진 규모의 문제도 기술적인 발달에 의존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교구단위의 의사를 결집시키면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므로 당연히 권력획득으로서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집단의 정치는 이미 낡은 가치로 취급받는 권력투쟁으로서의 정치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억측이 될까. 종교교단 내의 최고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일상화되다시피 한지 오래이고, 이를 질타하는 종교계 안팎의 움직임이 있는데도 개선될 기미가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불교를 포함해 종교는 인간의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가 종교내부의 문제, 특히 권력관계를 둘러싼 다툼으로 오히려 국민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불교 안에서도 정치가 불가피하다면 권력투쟁으로서의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불교의 정치적 이상은 무엇일가?

“불교의 이상은 개인적으로 성불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의 정심이 실현되는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국토가 불교의 이상국가에 해당한다.”(정천구, 붓다와 현대정치, 143쪽, 도서출판 작가서재) 붓다는 팔정도로서 이상 실현의 과정을 제시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칠불퇴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주 모임을 갖고 올바른 정사를 논하는가? 군신이 서로 화순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존경하는가? 법을 받들고 금기를 지키며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는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는가? 종묘를 받들고 조상을 경배하는가? 여성들이 정결하고 웃고 놀 때도 사특한 것이 없는가? 사문과 계를 지키는 자를 존중하고 받들어 부양하는데 게으름이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