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많겠지만 달마는 이입사행二入四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달마의 가르침의 요체가 곧 이입二入이며, 구체적인 실천 강령이 사행四行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이법理法의 깨달음인 이입理入은 철저하게 행위와 혼동됨이 없이 확대되어 하나하나의 행입行入에 이입理入의 실상을 부여해 간다. 이입理入 없는 행입行入은 없으며 행입行入 없이 이입理入은 없다.
이입理入이란 경전을 통해서 대의를 아는 것이며, 마음이 있는 사람은 범부나 성인 모두 진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만 번뇌에 쌓여 분명히 보지 못할 뿐이다. 만약 생각을 멈추고 본래의 진실로 돌아가 벽관에 충실하면, 자타自他와 범성凡聖이 모두 평등하며 한층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게 된다. 진리와 암묵 속에 계합함으로써 새삼스럽게 분별할 것이 없는, 그래서 작위가 없는 경지인 고요한 무위無爲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입理入이다.
행입行入이란 네 가지의 생활방식(四行)으로서 현생의 괴로움은 전생의 원한에 의한 과보로 받아들이는 행위인 보원행報怨行,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아가 없으며 모든 것을 현생의 인연에 맡기는 행위인 수연행隨緣行, 과보를 구하지 않는 행위인 무소구행無所求行, 법의 진실에 부합하는 행위인 칭법행稱法行 등 네 가지 행동을 말한다.
행입行入의 네 가지 실천 방법 중 먼저 보원행報怨行에서 보報는 갚는다는 것이고, 원怨은 원수라는 뜻이다. 따라서 보원행은 원수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로 압축된다. 현세의 육체적인 고통을 동기로 하여 이를 전생에 지은 원망의 과보라고 생각하여,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달게 감수하는 것은 단순한 수동적인 태도에서 원망을 계기로 하여 도에 든다는 식으로, 더욱 적극적인 수행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보원행의 특색이다. 금강경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수행을 할 때 신체를 가리왕에게 갈가리 찢겼지만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것이 바로 보원행이다. 괴로움을 만나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자세, 고뇌의 해탈을 반야개공般若皆空에서 구하는 자세 그런 공리인식空理認識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원행이다.
수연행隨緣行을 이해하려면 무릇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아가 없으며, 인연의 힘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같다고 여겨 항상 인연에 맡기고 살며, 좋은 결과나 명예 같은 것을 얻더라도 모두 전생에 자신이 지은 원인의 과보로서, 지금 얻었지만, 인연이 다하면 무無가 될 것이기에 기뻐할 게 없다고 생각하며, 좋고 나쁨은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행하는 것, 마음에는 어떤 증감도 없기에 기쁨의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고 암묵 속에서 도와 계합하는 것, 그런 것이 수연행이다.
수연행은 공무아空無我 원리에 대한 확인이다. 여기서는 현생의 좋은 결과나 영예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논점이 이동한다. 고통을 견디는 인욕보다 오히려 좋은 영예에 만족하지 않는 금욕이 더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영예에 흔들리지 않고 공의 확인을 구하는 것은 많은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일체 중생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방편대치를 해서 거두어들이는 이것이 수연행이며, 그 어떤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오더라도 그것을 수순해서 그것을 도의 바탕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수연행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은 구함이 없다는 말이다. 소所는 구하는 ‘바’가 없다고 해서 붙인 것이고, 그래서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잃고 어디에서나 사물을 덥석 무는 것을 구求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소구행이다. 실제로 경에는 “구함이 있으면 중생이요 구함이 없으면 부처다”라고 나와 있다. 중생은 항상 바깥으로 무엇을 구한다. 그런데 바깥으로부터 아무 것도 구함이 없는 자는 깨달은 자라는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에 눈 뜨고, 원리적으로는 세속과 정반대며, 항상 마음을 무위에 두고 몸을 운명에 맡기고 움직인다. 그렇게 하여 만유는 공이 되고, 즐거움도 희구함도 없게 된다. 욕구가 있으면 누구나 괴로우며, 욕구를 갖지 않으면 즐거우니, 욕구를 갖지 않는 것이 참다운 도인의 모습이라고 알아야 한다.
칭법행稱法行은 자기 자신이 본래 청정하다는 도리를 아는 법을 말한다. 자성청정심이다. 더러움을 없애서 깨끗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것이 마음이다. 칭稱은 공空이다. 깨끗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본래청정은 본래개공本來皆空, 무자성공無自性空을 뜻한다. 어떠한 개별적인 입장도 이 도리에서는 모두 공이다. 아무런 염착染着도 없으며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것도 없다. 더러움을 말끔히 씻기 위해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그런 티를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이며 깨달음의 도를 성취하는 길이다. 달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의 육바라밀 중 특히 보시를 강조하였다.
칭법행에서는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로 주는 물건과 보시 받는 사람, 이 셋이 보시라는 행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음이 핵심이다. 보시하는 사람이 자신의 선행위에 집착하고 받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거나 물욕에 집착한다면, 그런 보시는 범죄이며 물질 또한 오염된다. 법法은 ‘성품이 공하다’, ‘일체의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이고 칭稱은 하나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말로 바꾸면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고 하는 실천이 바로 칭법행이다. 일체의 사유와 일체의 행위,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부처님과 같은 말을 하고 부처님과 같은 행을 할 때 부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이고 이것이 칭법행이다.
우리의 선종사를 들여다보면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두 가지 문 - 이치로 들어가서 수행하는 좌선 벽관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사행 중, 이입理入은 철저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행입行入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감이 있다. 견성성불을 강조하는 만큼 보원행에서 칭법행에 이르는 실천행도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혜를 증득하는 것과 자비를 구현하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그 법륜이 동시에 굴러가야 원만한 것이다. 견성성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요익중생이고, 이것이 선종의 두 축이요 두 종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 모두가 불교의 종지를 지혜와 자비라는 두 입장에서 설하고 있고, 자비가 요익중행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을 넘어서서 일체중생을 요익되게 하겠다는 발원이 전제되지 않으면 좌선은 제대로 될 수 없다. 사실 지혜와 자비는 하나이기에 둘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자비가 발현된다는 것이요, 자비의 발현이 곧 지혜의 성취가 된다고 대승불교에서는 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견성성불이 곧 그대로 요익중생으로 발현되어야 비로소 좌선이 완성되는 것이다. 좌복 위에서의 올곧은 수행으로 이룬 깨달음이 결코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의 아픔과 번뇌, 고뇌와 질곡을 깔고 앉아 고통을 대신 받는 마음으로 괴로움을 해결하고, 그들을 구제하겠다는 광대한 보현행원이 깃들어 있어야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라면 인격과 수행이 일치되도록, 그래서 수행승들은 얼굴만 봐도 환희심이 솟고, 삼배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사람을, 모든 생명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요익중생이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자비심 없이 지혜를 현전할 수 없고, 요익중생 없이 견성성불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었다. 이 말은 이입 못지않게 행입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일상생활 가운데 이입과 사행의 법륜을 동시에 굴릴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수행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