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선禪 은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 역사로 인해 여러 의미가 덧붙여지고 파생개념들도 생겨나 더욱 번잡해졌다. 사전적 의미만 따져보면, 선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보는 과정 혹은 행위 그 자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이론이나 이념이 아니라 좌선이라는 수행과정을 통해 그 종교적인 진리를 구체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선은 마음을 통해 진리로 나아가는 일체를 일컫는다고 하겠다.
선불교는 이러한 선사상 혹은 좌선이라는 구체적 수행 과정을 구심점에 둔 불교를 지칭하는 것이며, 중국·한국 및 일본 기타 동북아시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불교의 한 지파이다. 중국에서 발생해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서 꽃 피웠다고 평가되는 선불교는 포교를 통해 구미 각국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 혹은 종교의 역할 중에서 선불교가 개인의 수행에만 치우쳐 그 대외적인 여러 가치들에는 매우 취약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선불교는 개인의 수행을 위한 가르침일 뿐, 대승 불교 본연의 사회적 회향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2. 본론
위에서 간략하게나마 선과 선불교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선불교 정신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도록 하자. 선, 혹은 선불교의 다양한 흐름을 관통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그 경지는 문자로선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불립 문자拂入)
둘 째,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은 오직 마음으로만 주고받아 알아볼 수 있다.(이심전심以心傳心)
세 번째, 중생은 본래 부처이다.(생즉시불生則是佛)
네 번째,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다.(견성성불見性成佛)
위 네 가지는 모두 마음 혹은 성품이 전부임을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성품이란 본래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중생과 부처, 나와 너, 선과 악, 몸과 마음 등 일체의 분별과 나눔을 여읜 청정함을 일컫는다. 즉 선불교 정신이란 자신의 본래 성품은 청정한 것이며, 그것은 분별을 여읜 것이며,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 부처가 된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다. 자성청정을 믿는 것,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론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선불교는 그러한 전제조건 위에 성립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절대청정이므로 무분별이며, 중생이 부처이므로 무소득인 것이다. 따라서 간략히 선불교의 정신을 설명하려면 무분별과 무소득,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종래 선불교는 개인의 수행, 그리고 깨달음의 영역에서만 논의되고 평가되었다. 좌선 수행, 화두 참구, 모든 선의 요소는 오직 어떻게 하면 분별심을 버릴 것이며, 성품을 바로 보아 피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전부였다.
선의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전문가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한 사상과 이해하기 힘든 공안으로 짜여진 벽이었으며, 혼탁한 세상을 벗어난 곳에서 영위할 그런 범접하기 힘든 분야였다. 그리하여 선은 점차 현실과 괴리가 생겼고, 구체적 삶의 현장과는 아무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으며, 중생들의 고민과 괴로움을 덜어줄 실질적 신행과 활동과는 무관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국외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선의 본래 정신과는 크게 어긋난 것이다. 선은 항상 ‘바로 지금’을 외쳐왔고 ‘오직 할 뿐’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언제나 지금 현재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아무 꾸밈없이 그저 볼 것을 역설한다. 이런 선불교가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괴리 될 수 있겠는가. 선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것이며 지금 이외 어떤 것도 따지지 않으며, 그러한 현실적 색채가 중국인의 구미에 맞았기에 그곳에서 불교의 새로운 모습으로 생겨나 전파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선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의 정신을 사회로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세상은 불교적 입장이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사회는 갈수록 고도화 되어가고, 무한 경쟁으로 치닫게 되면서 빈부의 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으며, 그런 척박함 속에 남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은 살아야 한다는 생존 절대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도덕은 내팽개쳐진지 오래며, 개인주의는 이제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물질만능주의와 향락주의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여 휘청대고 있는 형편이다. 사회의 구조와 전반적인 문화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에 낡은 것은 가차 없이 버려지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옳고 그름을 묻고 답할 새도 없이 흐름 속에 빠져 우리 모두 허우적대며 쓸려가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가치관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급속도로 진행되는 세계화 속에서 위에서 나열한 현대사회의 부정적 속성들이 난립하면서 ‘아노미 현상’이 아예 만성적으로 자리 잡았다. 선불교는 이러한 공허의 시대에게 다음의 사항을 역설하며 대안을 찾고 있다.
느림의 미학, 개인주의와 생존 절대의 풍조를 극복하기 위한 관용과 자비심, 인간 소외와 물질 만능주의의 폐해를 치료할 무소득의 주창, 분별, 대립으로 가득 찬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무분별의 정신을 가르치게 된다면 어떨까?
혹자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적, 현실적인 환원과 회향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토대를 구축하는 가치관의 재정립이다.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야말로 경전에서도 언급하는 ‘법보시’가 아닐까?
현대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약으로 지금 현재에 충실할 것을, 조금 쉬어갈 것을, 세상은 온통 하나로 연결된 것이며 나와 우리 전체가 둘이 아님을 역설하는 선불교 정신을 내놓는 다면 어떨까?
3. 결론
선불교는 지금까지 수행적 측면에서만 고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불교가 지닌 통합적 성격, 무분별과 무소득의 역설은 욕망으로 터져버릴 듯 솟아오르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현실적 수행처의 건설, 실질적 포교활동, 교세의 확장 등도 불교 자체에 대한 기여 및 사회적 환원의 차원에서 의미 있다고 하겠으나 모든 구조의 밑바탕에 깔리게 되는 가치관이 바르게 자리 잡지 못한다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불교가 지닌 무분별, 무소득의 정신을 긍정적으로 체화하여 사회의 삐뚤어진 가치 토대들을 가지치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사회적 회향이며, 최고의 법보시이며, 불국토를 실현할 지름길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