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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사회, 증오사회, 불교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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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편집실 2012년 09월 367호

옛 기록에는 소도(蘇塗) 또는 별읍(別邑)이라는 지역을 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솟대가 열기에서 유래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놓았다고 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니 특별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도망온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잡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7, 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였다. 명동성당 언덕에서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외쳤다.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쫓기면 명동성당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높은 담벼락이 쳐진 곳이 아니지만 경찰은 명동성당 경내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명동성당은 소도 같은 곳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조계사가 그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이 찾아들어 법당 옆에 텐트를 치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어느 샌가 소도 같은 곳은 차츰 없어졌다. 법당까지 경찰이 들어와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연행해갔다. 조계종총무원이 강력하게 항의하니 종로경찰서장이 사과했으나, 이미 소도의 기능을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잇달아 발생한 ‘묻지마 사건’을 보며 소도를 생각한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사회적 소외자 또는 약자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의정부 지하철역 사건과 여의도 사건의 범인은 일용직 근로자, 실직자다. 서울 중곡동의 전자발찌 살인사건과 수원 가정집 피살사건의 범인들은 동일범행의 누적 전과가 있었다. 또 충동적 범행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의정부 전철역 사건은 침을 뱉지 말라는 젊은이들의 충고를 듣고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 전 직장의 상사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은 미리 준비한 범행이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 충동범행의 일종이다. 일련의 사건 범인들이 가족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는 것도 일치한다. 좌절, 소외, 홀로 지내기, 충동, 자포자기, 증오 등의 악감정이 뒤얽혀 있다.
‘묻지마’가 아니라 ‘다중살인’으로 최근의 현상을 보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웅혁 경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이번 사건은 다중살인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공정하게 대접받지 못했다고 여긴 사람이 범행 대상을 미리 정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해친 범죄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다중살인을 ‘묻지마 범죄’와 구분했다. 구체적 표적이 있고, 사전에 범행을 계획하며, 범행 뒤 자살까지 계획한다는 점에서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묻지마 범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한겨레 인터넷판, 여의도 칼부림은 ‘일본식’ 아니라 ‘미국식’ 범죄, 2012. 8. 23]
범죄심리 전문가들은 선진국형 증오범죄가 우리 사회에 빈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긴장하고 있다. 2010년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전체 증오범죄 1만387건 중 72%인 7513건에 달했으며, 절도와 같은 재산 범죄는 2874건으로 전체의 27.8%에 그쳤다.[국민일보 인터넷판, 2012. 8. 23]
\'절망살인‘이라는 개념으로 사건을 진단하는 전문가도 있다. 최승원 덕성여대 교수(심리학)는 이번 사건에 대해 “불합리한 상황을 해소할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다중을 표적으로 삼는 ‘절망살인’의 범인들은 처음엔 자신을 탓하다가 점차 비난의 대상을 주변 동료·친구로 바꾸고, 나중에는 자신을 절망의 상태로 밀어 넣은 것이 이 사회 전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특히 김씨를 비롯한 최근 사건의 피의자들이 사회경제적 곤궁에 처한 빈곤·소외층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처지에 놓인 이들이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비관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절망살인’으로 부를 만하다.[한겨레 인터넷판, 2012. 8. 23]
왜 이들이 절망 또는 증오를 다중을 향해 표출하는 것일까.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가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임상심리학자 조용범 박사는 “실업이나 경제적 문제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인 복지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내 잘못만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며 “지금의 한국은 폭력적인 분노 수준이 상당히 높은 사회”라고 지적했다. 최승원 교수는 “한국에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가족 붕괴 등이 매우 급속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이에 따른 범죄 등 악영향이 서구보다 더 과격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한겨레 인터넷판, 2012. 8. 23]
절망과 증오가 지금 우리가 사는 2012년만의 현상은 아니다. 오래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은 절망하고 누군가를 향해 증오할 것이다. 완전한 사회가 아니고 욕망에 허덕이며 사는 사바세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절망하는 이들을 보듬어주고 다독여주는 장치가 있었다. 증오를 증오로써 발산하지 않고 에너지로 삼게 했던 완충이 있었다. 가족과 가정이 대표적이다. 가족은 묻지 않고 보듬어주고, 돌아가면 따뜻하게 맞아주는 품이다. 그런데 가족은 해체 상태에 있다. 먹고 사는 일이 힘겨워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2010년 1인 가구 수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 대비 23.9% 414만 가구다. 네 집 중 한 집은 혼자 산다. 1인 가구라고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자발적 1인 가구의 증가가 문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1인 가구를 4가지 그룹으로 분류했다. ‘골드 미스, 미스터 그룹’, 미취업 상태인 우울한 싱글 ‘산업 예비군 그룹’, 이혼과 사별, 기러기 아빠 등과 같은 해체된 가족의 ‘불안한 독신자 그룹’, 그리고 고령사회의 중심인 ‘실버세대 그룹’ 이다. 골드 미스, 미스터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부류는 사실 비자발적인 1인 가구에 가깝다.[이지은, 화려한 싱글? 우울한 싱글! 1인 가구의 2대8 그림자, 여성가족부 위민넷]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가혹한 경쟁, 가족 해체, 우울한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를 기록한 지표가 이미 우리 사회가 비정상이며, 위험사회란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경쟁보다는 협력과 조화의 가치가 추구되고, 가족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 지점에서 종교, 우리 불교는 무엇인가. 중생들은 절망 속에서 증오로써 절규하는데,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불교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는 오래 역사 속에서 사회복지 실천의 종교였다. 고려시대 대비원이 그랬고, 조선시대 의료기관이었던 활인서에는 꼭 스님들이 있어 병자를 돌봤고, 망자들의 마지막을 장엄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사찰에 깃들어 인간다움을 지켜가고 있다. 전국 각지의 사찰들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찾아가 다독이고 있으며,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꿈을 펼치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증오를 분출하기 이전 부처님의 자비스런 모습을 떠올리던가, 그윽한 풍경소리에 머물게 할 수 없을까.
아울러 사회적 약자와 이탈자를 위한 정책을 세우도록 재촉하는 일도 불교의 몫이다. 정부와 정권은 가만 두면 힘 센 자들의 자장에 빨려들고 만다. 그들만의 정부가 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이런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불교의 고유한 자비정신의 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