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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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땅 좋은 벗 - 안혜령
1999년 03월 205호
43번 국도를 달려 포천군 끄트머리께 영종면 성동2리에서 그 집을 찾았다. 대문은 물론 없고, 큰 길가 ‘작은 누리’라 새긴 목각 팻말이 아니라면 마냥 그 자리를 맴돌 판이었으니, 칼바람 피하느라 낡은 집 앞에 나무기둥 세우고는 온통 비닐을 두른 탓이었다. 열다섯 평짜리 본채와 큼직한 축사, 헛간 같아 보이는 건물 두셋 들어선 오백 평 땅과 집을 에둘러 감싼 이천 평 밭이 가정공동체 ‘작은누리’ 열두 식구의 보금자리다.
식구가 열둘, 분명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인데, 한 핏줄끼리 모인 보통 가정이 아니다. “여섯 줄기 아홉 자식”이라 한 이 집 가장 박형규 씨의 표현대로 네살부터 열여덟살까지의 아홉 아이들 가운데는 그이 부부의 아이도 있고, 입양한 아이도 있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맡아 기르고 있는 아이들도 있으니, 이렇듯 저마다 사정이 다른 아이들이 가족으로 모여 살게 된지 육년째이다.
더 ‘별난’ 것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대신 박형규 씨 부부와 그의 부친이 선생님이 되어 가정학교란 것을 꾸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작은 누리란 혈연 관계가 아닌 열두 식구가 한솥밥 먹으며 살 부대끼고 사는 삶의 터전이자 세 어른이 아홉 아이를 가르치는 작은 학교인 셈이다.
나이 마흔에 지식을 아홉이나 둔 박형규 씨는 신부가 될 뻔한 사람이다. 성공회 신학대학에서 신부과정 다 마치고 성직자가 되는 시험인 성직고시까지 합격해 놓고는 등 돌려버렸으니, 아무래도 뭇 중생 속에서 애닮고 고달픈 인생 서로 도닥거리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던가 보다.
대학시절 고아원이며 영아원을 드나들며 그는, 그 곳이 그저 수용 시설일 뿐 따뜻한 양육과 바른 교육으로 아이들을 감싸 안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바람직하기는 부부가 아이들을 입양해서 가족을 꾸리는 것이며 나아가 그런 가정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제 핏줄에 대한 집착이 유별난 이 나라에서 자본주의의 급성장에 따른 폐해가 빚어낸 극심한 개인주의, 가족이기주의를 넘어 공동체적 삶으로 가는 한 길이라 믿었고, 그 신념대로 자신부터 그 길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의 부인 양임 씨는 그가 성직을 포기하고 한때 교사로 나가던 산업체 학교의 학생이었다. 열한 실이나 차이지는 이 앳된 처자는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달랑 혼인신고만으로 그와 부부의 연을 맺을 만큼 당찼다. “가난을 선택”한 사람을 스스로 택했으니 열두 명 뒷바라지도 큰일이 아니고, 서른이 채 안된 나이에 아홉 아이 엄마 노릇도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다.
93년 7월에 결혼을 하고, 11월에 서울시립아동상담소에 가서 초록이와 아름이를 데려왔다. 세살 나고 네살 난 자매였다. 뒤이어 민우, 산하, 나무, 명환이, 석주, 순예, 설희가 태어나고 들어왔다.
남의 아이들을 거두어 키운다는 것은, 물론 흔하지 않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보살행이라 하겠다. ‘작은누리’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작은 공동체에서 실현하고 있는 가정학교라는 교육형태다.
지난해 아름이의 취학통지서가 날아 들었을 때, 박형규 씨는 다음의 이유를 들며 입학 유예 신청서를 냈다.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마음의 상처를 지닌 우리 아이들은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교육시킬 것이다.” 그 지난해에도 그랬으니, 무상의무교육을 거부하는 잘난 사람보려고 포천 교육청에서 달려오고 동네 면장까지 찾아왔다. 올해도 같은 일이 벌어질 터이고, 어쩌면 과태료 백만 원을 물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나, 그는 완고히 제 아이를 교육시킬 부모의 권리를 주장한다. 중고동학교는 아이가 원하면 보내지만, 초등학교만은 인성이 틀을 잡는 가장 중요한 때이므로 안 보낸다는 것이다.
대안교육의 하나로서 이른바 홈스쿨링 또는 가정학교라 불리는 교육운동은 칠십년대 들어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부모들이 학교에 대한 강한 불신감으로 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몸소 가르치겠다 나섰던 것이다. 가정교육에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삶을 이룰 수 있도록 개인 지도함으로써 기존의 학교교육보다 더욱 창의적인 사람을 키워낸다는 연구결과도 이들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가정교육이 이제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 자리잡았고, 주정부나 일선 교육기관에서는 이들에게 공식적인 자문과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형편이 다르다. 대안교육이라는 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들어서이며 그나마 그 형태도 대안학교가 주를 이룬다. ‘교육이란 곧 학교교육’이라는 고정관념이 절대적이거니와 학교 교육의 제도와 규범, 가치관이 곧 사회의 축약판이자 아울러 그 토대이기도 한 현대 사회에서 ‘탈학교’란 단순한 교육 형태의 변화를 넘어 삶의 방향과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96년부터 대안교육을 연구하는 ‘대안교육 그물모임’에 참여했던 박형규 씨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대안교육을 실행하기보다는 ‘탈학교’의 형태에 줄곧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학원 강사로서 이른바 사교육의 현장에 있으면서 공교육과 사교육이 “함께 딜레마에 빠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았던 것도 그가 가정교육에 골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나 이제나 학교는 조금도 달라진바 없이 여전히 일렬종대의 줄서기가 계속되고 있어서 그 줄에서 밀린 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교육에서 소외 받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고, 그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교육내용 또한 불만스러웠다.
더욱이 마음 한 구석에 아픔을 가진 작은누리 아이들은 자칫 자기 연민이나 비하에 빠질 수도 있는 터. 왕따 문제가 시끄러운 학교 현장에서 그 이이들이 온전하게 사랑을 베풀고 받을 수 있을까. 그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이란 “몸과 마음이 골고루 아울러 튼튼해지”는, “생명과 자유의 본성에 따라 강하고 순결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다. 바른 자아를 찾아 제 두발로 서서 다른 이도 일으켜 주며, 인간 삶의 환경이자 토대인 생태계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루어가도록 실천하는 일이다.
오늘의 학교교육에서 이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것이 사실일 터이다. 학교가 이미 치열한 경쟁 사회인 터에 상생과 공생의 도리가 어디에 발붙이겠는가. 그러나 문제를 인식한다 한들 달리 마땅한 대안도 없는 터라 대다수 부모들은 그저 아이 등 떠밀어 학교에 보낼 수밖에는 달리 수가 없는 형편이다.
‘작은누리’ 아이들은 97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 안 가기’를 아이들에게 문제로 던져 주고 한 일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처음에 학교공부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쏘다녔다. 저희들끼리 한탄강 탐사니 동네 조사니 한다고 몰려 다녔고, 그와 함께 왕복 14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 여행하기도 했다. 두어달 지나자 아이들은 슬슬 책을 찾기 시작했고, 그가 짠 커리큘럼에 따라 규칙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공부는 하루에 세 시간 정도. 강의식 공부는 최대한 줄이고 함께 읽고, 스스로 경험하고 생각하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식 공부에서 가장 힘을 쏟는 것은 역사와 문학이다. 시와 소설, 우리 역사와 세계 역사를 어린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큰 아이들은 그와 함께 읽으며 배운다.
생태계 이야기나 신문 읽고 토론하기, 할아버지의 지도로 이루어지는 음악, 미술 수업도 활기찬 시간이다. 원하면 수학은 제 수준에 맞는 학습지를 풀고, 영어는 그에게서, 할아버지에게서는 일본어를 배운다.
올해 일흔 다섯인 그의 부친 박정근씨가 작은누리의 식구가 된 것은 97년부터다. 개신교 목사로서 장남이 성직 마다하고 하려는 일이 영 마땅찮고 못미덥다는 얼굴로 일본에 가셨던 분이 돌아와 보시고 두말 않고 눌러 앉으셨다. 게다가 당신이 가지신 예술적 재능을 이·이들에게 풀어놓으시니, 작은누리의 훌륭한 선생님이자 큰 어른이시다.
일 주일에 한 번은 풍물판을 벌이며, 앞으로 검도와 기천을 익힐 예정이다. 여행은 역사와 문화와 생태 교육을 위한 살아 있는 공부인 만큼 지난해에 그랬듯이 올해도 열심히 두세 달에 한 번은 12인승 봉고차에 모두 몸을 싣고 떠날 것이다.
기존 학교의 교과목수로 보면 절반이나 될까마는 어른 셋이 감당하기에는 만만찮을 일이나, 수북이 쌓인 갖가지 주제별 스크랩북들은 결코 게으를 수 없는 세 어른의 처지와 공부가 일상이 된 이 집 형편을 보여준다.
‘작은누리’에서는 손과 몸을 놀리며 하는 일이 더 중요한 공부다. 특히 목각은 앞으로 수익사업으로까지 키울 생각을 하고 있는 부분으로, 개집과 닭, 오리장은 물론이고 집 구석구석의 탁자며 선반, 신발장, 침대 같은 것들이 그와 아이들의 합작품이다.
예전에도 텃밭 일구어 옥수수며 채소들을 심고 길러 양식으로 삼았듯, 이제 이천 평 밭도 이 집 식구들이 함께할 작업장인데, 새끼 때부터 기르던 진돌이며 봉순이를 돌보고, 닭이며 오리 들에게 모이를 주고 관리하는 일까지도 아이들에게는 자연의 순환과 상생의 도리를 일깨우며 제 손과 몸으로 생활을 일구어 나가는 즐거움을 깨우치는 소중한 산 교육이다.
저희들끼리 뭉쳐 지내면 사회성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듣는다. 그러나 이른바 사회성이란 것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 하나에 다름 아니겠느냐는 생각이고 보면, 그런 사회성은 차라리 마다하고 싶다. 대신 아이들은 일요일이면 교회 주일학교에 가서 또래들과 어울리니 그가 보기에 훨씬 건전하고 바람직한 만남이다.
“생각을 넓혀 주는”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아아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맏이 순예는 보육교사가 될 꿈을 키워가고 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석주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 한다. 산하는 윤도현이나 강산애 같은 록가수가 되고 싶어 하며, 생일 선물로 「그리스 로마 신화j를 주문할 만큼 역사를 재미있어 하는 민호는 커서 역사를 연구하겠다고 한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명환이는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야무진 생활을 해나가고 있으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카센터에서 정비 기술을 배우고 주말이면 집에 온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 가 자동차와 관련된 전문적인 공부를 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지금이라고 쾌 나이진 바는·없지만 그 동안 참 어려웠다. 열두 식구 먹고 사느라 이 집 가장은 막노동꾼, 학원 강사, 감자탕집 주인 같은 별별 일을 다했다. 쌀 떨어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식구가 열둘이다 보니 다달이 거르지 않고 돌아오는 생일이면 특별 메뉴로 튀김접시 내 놓는다는 이 집 안주인은 “ 먹는 건 별일 아니다”라고 웃는다. 덧붙이기를 아름아름으로 찾아오는 이들마다 한결같이 들고 오는 라면 박스만은 사양하고 싶다고 한다.
임대한 것이기는 하나 밭 이천 평을 생각하면 작은누리 식구들은 한결 뿌듯할 듯하다. 농삿일로 “자급자족자생”의 생활 철학이 실현될 수 있을 테니 앞으로는 밭일에 매달려야 할 게다. 일 주일에 한 번씩 가족회의를 열어 이런저런 문제를 풀어가지만 아쉬운 것도 많다. 무엇보다 이웃에 이런 집이 한둘만 더 있으면 좋겠다. 느슨한 형태로 나마 공통체적 삶의 고리가 맺어짐으로써 아이들 교육의 내용도 풍성해질 것이고, 이 운동의 파급효과도 훨씬 커질 수 있으리라.
박형규씨는 할 일이 많다. 그가 생각하는 바른 교육의 그물망을 짜고자 요즘 그가 꾸려 가는 포천 어린이 동시반 같은 형태로 논술반 따위를 만들어 더 많은 아이들을 불러모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육십 평 남짓한 축사를 도서관 겸 작업실로 꾸며 이 일대 아이들에게 개방할 생각이고, 나아가 계절학교도 구상하고 있다. 구립 어린이집에조차 아이를 맡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어린이방도 그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
“교육의 권리를 마땅히 가지고서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으로 마음아 편치 않은 사람이니, 이 일들을 반드시 이룰 것 이다. 다만 아이들 키우고 농사 지으면서 깨달은 바대로 “천천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길을 가고자 한다. 그 길에 그 혼자뿐이랴. 이즈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쩍 눈에 띄고 있어 반갑고, 변함없는 동지들인 대안교육 모임이자 도서출판 ‘민들레’ 식구들이 따뜻한 후원자가 되어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의 외인구단”인 작은누리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