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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밤을 비추고, 뱀은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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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어 - 정인경┃철학박사 2012년 06월 364호

“검은 이브의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는 뱀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위험한 열정이 있어야 삶의 춤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러니 달밤이 그저 어둡기만 하지 않고 환합니다.”
- (이주향, 《그림 너머 그대에게》)


1. 영주가 뱀을 만나다

“뱀이야! 뱀이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영주가 연신 같은 말을 외쳐 댄다. 뭍에 오른 고기처럼 펄떡이는 영주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면서 진정시킨다.
“물렸어?”
강하게 도리질을 한다.
“괜찮아. 물 마셔! 천천히.”
한숨을 돌리더니 자기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치를 떨며 한다.
“안경을 쓰고 갔어야 했어! 아무 생각 없이 상추를 솎아내고 있는데, 채마밭 한가운데 쯤 갔나, 검은 비닐호스 같은 게 보이는 거야. ‘아니 누가 이런 쓰레기를 밭에 버리고 갔어.’하고, 집어 던지려고 손을 뻗치는데 그냥 느낌이 서늘한 거야.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숙여 자세히 보았더니 뱀 인거야!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나서는 죽자 살자 막 뛰었어.”
“아니, 한 여름에나 일어나는 일이 벌써 일어나네. 요번 봄은 아예 물 건너갔구먼. 이 동네에서 독사는 아직꺼지는 못 봤으니 그리 놀라지는 마슈. 바구니나 찾으러 가야겠네유.”
공양주 보살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호들갑이라는 투로 말을 마치고는 이내 채마밭 쪽으로 향해 나선다. 친구는 끔직한 동물을 만나 놀란 마음을 진정한 뒤에는, 사람들이 함께 놀라지 않는 것에 의기소침해졌다. 특히 내가 그다지 놀라지 않고, 위로를 해주지 않는 것이 괘심한 듯이 굴었다.
“영주야, 내가 뱀을 싫어하지 않게 된 이야기 해줄까?”

2. 뱀이 나타나기 시작하다

미얀마 사람들이 말하는 겨울이 가자마자 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 수행일정을 다 끝내고 숙소 건물에 들어가려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 있다. 외국인 집중 수련 기간이 끝나고 남아 있는 유일한 한국인인 oo스님과 나에게 “Snack!\"하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누는 결코 뛰는 일이 없다. 긴 그림자를 느릿느릿 뒤로 하고 와서는 신발장 옆에 세워져 있던 긴 대나무 막대를 집어 든다. 의문은 언젠가는 풀리게 되어 있는데, 오늘밤 대나무 장대가 항상 세워져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한참을 우리를 밖에 세워 두었지만 뱀은 이미 숨은 지 오래이다. 누가 빈손으로 나와서는 우리에게 그냥 들어가 자라는 듯한 말을 한다. 차라리 밖에서 자고 싶다. 각자의 방으로 가기 전에 스님에게 넌지시 묻는다.
“스님, 혹시 이 숲에 독사도 살아요?”
“알려고 하지마.”
“그럼 있다는 거잖아요.”

방에 들어서기 전에 플래시를 켜 구석구석을 살핀다. 도착하자마자 플래시를 준 이유도 이제 분명해졌다. 지금은 숲으로 두타행을 떠난 비구 스님이 플래시를 챙겨 주시기에 별로 필요가 없다고 거절을 했다. 스님은 “야생 동물이 많습니다. 가지고 계세요.”하면서 강권하다시피 주셨다. 온대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야생동물로 멧돼지를 생각했었는데 뱀일 줄이야! 숙소의 바닥은 타일을 깔아서 시원하다. 내가 뱀이라도 낮의 열기를 잃지 않고 있는 흙과 풀보다는 이곳이 살기에는 좋으리라 싶다. 방과 욕실을 둘러보는데, 이 건물은 도대체 구멍투성이다. 정말 대충 집을 지었다. 뱀이 원한다면 이 구석 저 구석 못 갈 곳이 없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무서워서 잠이 안 온다.
“악∼아~ㄱ!”
누군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역만리까지 와서 독사에 물려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님, 클레오파트라처럼 죽기 싫어요!”

3. 내가 뱀을 만나다

“세알리, 발목 조심하세요!”
아니, 무슨 밤 인사가 발목을 조심하라니. 오늘은 보름달이 낮게 떠 검은 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뜨거웠던 낮을 잊게 해주는 밤바람은 숲속 나무들의 작은 잎까지도 일으켜 세우고 있다. 남국의 꽃들은 진한 향기로 별빛 터트리듯이 밤공기를 채우고 있다. 이 아름다운 밤에 나는 한국어 법문을 듣고 헤어지는 세알리에게 내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은 작별인사를 해 버린 것이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 놀란다. 그러더니 내 눈은 멀찌감치 앞서서 가고 있는 세알리를 쫓는다. 그런데 숙소의 철문 못 미쳐서 세알리가 멈칫한다. ‘저 스님이 왜 저러나’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면서 계속 본다. 하지만 곧 성큼성큼 걷는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현관문을 밀려고 하는데 빨간 색과 베이지 색의 줄무늬사이에 검은 줄이 연속적으로 나 있는 둥글고 통통한 끈이 쇠창살에 걸려 있다. 그런데 끈이 경쾌하게 “호로록” 안으로 들어가며 꼬리처럼 보이는 것을 뻣뻣하게 세우는 것이다. 예전에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던 장면과 비슷하다.
“누~!”
경내에서는 묵언이지만 상관없다. 큰 법당에서 미얀마 법문을 하건 말건 안중에도 없다. 아무도 그렇게 큰소리를 낸 적이 없을 거지만 상관없다.
“누!, 누~!, 누~!”
드디어 누가 뛰어 오고 있다. 누에게 뱀이 복도에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누는 우리에게 멀리가라고 손짓을 하지만, 나는 유리창 없는 창문으로 복도를 들여다본다. 누가 불을 켜자 복도 한 가운데 길게 누워 있는 뱀이 보인다. 그런데 동물원에서 본 뱀과는 다르다. 흉물스럽지가 않다. 죽어있는 나뭇가지에 뒤룩뒤룩 살이 쪄서 축 늘어져 있는 뱀과는 완전히 다르다. 불빛을 받은 뱀의 피부는 조화롭게 반짝이고, 그것이 가진 색깔도 아름답다. 나는 뱀을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의아스럽다.
“새벽에도 신발장 옆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어. 대만 비구니랑 나랑 눈 꾹 감고 지나왔지. 인경 씨가 나올 때도 있었을걸. 그대가 눈이 나빠서 못 봤지.”
법문을 들을 때, 필기를 하느라고 안경을 쓰기 때문에 이제야 뱀을 본 것이다. 뱀은 누가 자기를 걷어 올리는 것에 별반 저항하지 않는다. 의례 그래왔다는 듯이 탄력 있는 몸을 말아 걸치는데, 칸나의 꽃대가 늘어질 때와 같은 모양이다. 누는 의기양양하게 대나무 막대를 앞세워서 나온다.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따라 누를, 아니 대나무에 걸린 뱀을 쫓는다. 누가 야구선수처럼 스윙을 해서 뱀을 풀숲 깊은 곳으로 날려 보낸다. 뱀이 저 멀리 날아가다가 보름달 한가운데 걸린다.

달은 밤을 비추고 뱀은 춤추고 있다.

순간 세상이 내 살과 피를 관통해 들어오는 것 같다. 나는 삶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황금 열쇠를 손에 쥔 것 같다. 생각이 닿지도 않는 곳에서 생긴 꿈 한 조각이, 글이 접할 수도 없는 곳에서 온 빛 한 줄기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나’의 것이 아닌, 잃어버린 곳의 기억을 떠 올리라고, 조각난 꿈들을, 산란한 빛을 ‘나’의 것으로 맞추어 보라고 한다.
황금빛 달은 검은 땅에 빛을 내려주고 독 많은 아름다운 뱀은 낙화와도 같은 순진무구한 춤을 추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풍경 안에서 동화와도 같은 공포와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수함으로 피리를 부는 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 피리 소리는 독사에게서 꽃을 피우는 달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달의 노래는 모순마저도 끌어안았던 생명의 세계를 향해 울려야 한다. 나는 생과 사,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더 이상 반대의 것으로 지각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피리를 불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