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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의 법정法頂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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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정준극┃KBS 라디오 음악칼럼니 2012년 06월 364호

법정 스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덧 2년이나 지났지만, 2010년 3월에 세상을 떠나셨을 때에는 그분의 저서가 책방에서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짐작컨대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분의 사상과 주장을 재조명해보자는 움직임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게으른 탓에 실상 그분의 저서를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분의 저서가 몇 권이나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분의 무소유에 대한 주장은 기억하고 있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공감하는바가 크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며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심도 있게 파악코자 노력한 일도 없다. 불교에 대하여는 단연 문외한이다. 그런데도 법정 스님이란 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며 그분의 말씀은 뜻이 깊다’라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72년 초여름에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후 두어 번 다시 만나 좀 더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특별히 그분을 잘 알아서 만난 것은 아니며 그저 우연히 친구와 함께 만났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때 그분의 말씀 중에서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니 바로 무소유에 대한 것이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매여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했다. 그분은 또한 ‘무소유라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분의 이 같은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무지의 소치로 인하여 아직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심오한 말씀이다. 되도록 생활의 지표로 삼아도 좋을 훌륭한 말씀이다’라는 생각은 그치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소유’를 주제로 하여 논하신 분들은 허다하다.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종교계의 지도자 되시는 분들이라면 ‘무소유’를 주제로 하여 최소한 한번 이상 설법 내지 설교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말씀은 오히려 위선으로 들려서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40년 전 봉은사에서 잠시 만난 법정 스님의 말씀은 평생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적어도 나의 우견이나마 그분의 소탈하고 검소한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어서 일 것이다.

내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지금으로부터 어언 40년 전인 1972년 6월 어느 날 봉은사에서였다. 동아일보에 있는 친구가 봉은사에 가서 법정 스님을 만나야 하는데 할 일이 별로 없으면 같이 가서 절구경이나 하자고 해서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봉은사라는 절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다만 법정 스님에 대하여는 그분이 간혹 동아일보에 기고를 하였기 때문에 성함 정도만을 알고 있었고 ‘참으로 글을 조리 있게 잘 쓰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분의 속명이 박재철이라는 것과 그분이 1932년생이라는 것 등등은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1972년이라고 하면 그분이 꼭 40세가 되던 해였다. 그러므로 아직 청년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법정 스님은 이미 우리나라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알아 모시는 훌륭한 승려이며 학자이고 문인이었다. 사람들은 그분을 승려이며 학자이고 문인이라고 말했지만 나보고 말하라면 철학자이며 사상가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사상가라고 해서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며 이념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분이라는 말이다.

지금이야 봉은사라고 하면 강남구 삼성동의 노른자위를 드넓게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사찰로써 여러 면에서 막강하지만 지금부터 불과 4, 50년 전만 해도 뚝섬 건너편의 시골에 있는 조용한 절이었다. 나와 동아일보 친구가 어떻게 봉은사를 찾아갔느냐 하면 지금 생각해도 ‘그럴 때도 있었나?’라고 하겠지만 우선 태평로에서 동대문까지 겨우 택시를 타고 간 후 당시 동대문 운동장(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뒤편에서 한참마다 출발하는 뚝섬 가는 전동차를 얻어 타고 왕십리를 거쳐 덜덜거리고 가다가 뚝섬에서 내려 그곳에서는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서 아마 지금의 영동교 있는 곳에서 내려 봉은사까지 땀을 흘리며 걸어갔던 것이다. 지금이야 태평로에서 삼성동 봉은사까지 자동차로 반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그때에는 무려 세 시간이 족히 걸렸다. 뚝섬에서 한강을 건너 내리면 사방이 온통 채마밭이었다. 무도 심고 배추도 심은 밭이 끝도 없었다. 당연히 번듯한 길도 없었다. 지금의 경기고교가 있는 언덕을 수도산이라고 불렀다. 수도산을 넘어야 봉은사 기와집들이 보였다.

그때에는 핸드폰이란 것이 있지도 않아서 겨우 사무실 전화로 연락을 해야 했다. 동아일보 친구가 법정 스님을 만나 원고를 청탁해야 하는데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 중에 겨우 봉은사에 잠시 기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봉은사로 전화를 하였으나 법정 스님은 잠시 출타 중이어서 다음날 불문곡직하고 찾아뵈러 갔던 것이고 먼 길을 혼자 가기가 심심하니까 나보고 동행하자고 하여서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점심때쯤 봉은사에 도착했다. 법정 스님은 종무실로부터 미리 연통을 받아서인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땀이 가시자 법정 스님은 마침 공양 때이니 밥이나 먹자고 권하였다. 잠시후 어떤 젊은 스님이 가져온 소반을 보니 보리가 상당히 섞인 밥에 반찬으로는 배추 겉절이, 그리고 된장에 심어두었던 고추와 생오이를 썰어 놓은 것이 전부였다. 우거하시는 방은 너무 좁아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었다. 당연히 시장 끼가 한창이어서 별다른 불만 없이 점심을 들고 냉수도 많이 마셨다. 오래전의 식사인데 어찌 이렇게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느냐 하면 나이가 들면 예전에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보다는 어디 가서 무엇을 먹었는지를 더 잘 기억한다는 법칙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당시에 왜 봉은사에 잠시 기거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법정 스님은 성북동에 길상사라는 절을 세우셨다고 하므로 그곳에 가서 주인스럽게 지낼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교통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봉은사에 계셨는지 모르겠다. 법정 스님이 자주 거처로 삼으시던 절로써는 순천 조계산의 송광사도 있다고 하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봉은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집필을 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가서 시간을 빼앗았던 것이다. 법정 스님과 세상 돌아가는 한담이나 하다가 결국 그분의 주장이신 ‘무소유’에 대한 얘기로 건너가게 되어 이런저런 말씀을 들었던 것은 그 때였다.

법정 스님을 만나서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아무튼 그로부터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며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무엇인지를 놓고 이리저리 구상하는 습관이 생겼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이 ‘무無’가 될 수 있으며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무無’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머물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려워서 접어둔 경우가 누차였다.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법정 스님을 만나 그분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후에 ‘무소유’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소유에 대한 사상을 그 이상으로 탐구하고 발전시킬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여 그저 간혹 법정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과연 대단한 분이다. 참 훌륭한 분이다’라는 생각만 할 뿐이다.

오늘날의 세태처럼 법정 스님의 말씀이 처방이 되는 때는 없다는 생각이다. 법정 스님은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 얼마나 부자로 사느냐, 권력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소중합니다’라고 말씀하였다. 이어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귀있는 자는 들어야 할 말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