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거래처를 돌다가 마침 집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길밥을 먹는 것보다는 집에 들러 남은 밥에 라면을 말아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아내도 이 시간에는 집에 없으니 눈치 볼 이유도 없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내가 익히 아는 ‘우리 동네’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꼬마 녀석들이 학교를 파했는지, ‘무방비 도시’를 점령한 점령군처럼 빛과 재잘거림과 웃음으로 거리를 막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들이 세운 행복의 마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 뒤쪽 동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의 수가 줄더니, 내가 사는 301동에 이르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그라졌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앞에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우리 동에도 ‘행복의 점령군이 와 있네.’싶어서 장난삼아 몸을 숙여 내 얼굴을 아이의 코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아이의 얼굴은 누구에게 맞았는지 푸르락했다. 코밑은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울었는지 눈매가 붉으락했다. 얼른 얼굴을 치웠다. 장난을 친 것이 미안했다. 아이가 맞았는지, 싸웠는지, 아니면 팼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바짝 마르고 목을 옆으로 기울이고 서 있는 아이가 또래를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있는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한, 최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아, 힘내!”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2.
“폐병장이!”
창호 형은 5학년인데도 정말 무식하다. 내가 늑막염을 앓고 있다고 말해주었는데도, 폐병장이라고 부른다. 창호 형만큼 무식한 아이들, 창호 형의 똘마니들은 나를 폐병장이로 알고 슬슬 피한다. 나는 늑막염 때문에도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 놀 수도 없었지만, 창호 형의 입 때문에도 아이들과 섞여서 놀 수가 없었다. 창호 형이 그럴 때마다 달려들었지만, 3학년인 나에게 창호 형은 너무 컸다. 병을 앓고 있는 나에게 창호 형은 너무 건강했다.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창호 형 패거리의 ‘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유일한 놀이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평상에 앉아서 구경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장기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워 장기 말의 길이 훤했다.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훈수를 두는 바람에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사이에서는 스타였다. 그런데 오늘 평상에 앉아 있는 나한테 그런 욕을 한 것이다. 이 평상에서 밀리면 나는 갈 곳이 없다.
“무식한 새끼야, 늑막염이라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창호 형과 붙자마자 나는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일찌감치 싸움의 승패가 나자, 할아버지들이 레슬링의 심판처럼 우리를 정리해 주셨다. 창호 형을 점잖게 타일러 보내고는, 나더러는 집에 가서 씻으란다. 야속했다. 엉엉 울면서 집까지 갔다.
3.
“똘아!”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집안을 믿지 못할 굉음으로 채웠다. 조금이라도 미적거린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에 오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이 없었다. 몇 달 만에 와서 겨우 며칠 있다 가면서도, 밥 먹을 때 쩝쩝거리지 말라는 둥, 밥 한 번에 반찬 한번 먹으라는 둥 하염없이 눈치만 보게 하는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검은 얼굴만큼 검은 베레모에,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고 집에 들어오는, 거인 같은 아버지를 보면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람도 식은 죽 먹기처럼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군인이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 섰다. 아버지께서 아주 쬐끔한 상자를 내게 주시면서 열어 보란다. 천자문에서 본 한자들이 가득 쓰인 상자를 여니, 매우 작은 나무통이 나왔다. 나무통도 열었다. 종이에 쌓인 유리구슬 같았다. 종이도 베끼라고 하셔셔 베끼니 한약 냄새가 확 풍겼다. 황금빛의 말랑말랑한 구슬-약이었다.
“힘이 세지는 약이다. 아버지와 내 부하들이 훈련을 받을 때, 힘이 세지는 약을 먹는다. 하지만 네 손에 있는 약은 괴뢰군을 무찌를 때, 먹게 되는 약이다. 이 약을 먹으면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무찌를 수 있고, 피가 나더라도 아프지 않고, 총알이 몸을 뚫는 고통도 참아낼 수 있단다. 이 약은 국가의 비밀이다.”
4.
다음 날, 오후까지 기다렸다. 약을 손에 쥔 순간부터 달려가서 ‘윤 창호’를 박살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 외로움과 고통의 원인인 윤 창호를 그렇게 대적해서는 안 되었다. 윤 창호의 똘마니들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폐병장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했다. 오후 4시 쯤, 그네들의 골목으로 향했다. 멀리서 그네들이 말뚝 박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중히 간직했던 ‘힘이 세지는 약’을 아구작 아구작 씹어 먹었다. 먹자마자 하루정도 힘이 세진다고 했으니 지금 붙으면 되었다.
“야! 윤 창호! 일대일로 붙자.”
나는 나보다 목 하나는 더 큰 형을 향해 미치듯이 뛰었다. 서로 때렸고, 발길질도 했고, 서로 피가 났지만, 슬슬 네가 이겨가고 이었다. ‘힘이 세지는 약’은 아버지의 말 그대로였다. 나는 피가 나도 아프지 않았고, 창호 형의 철권도 참아 낼 수 있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내가 강해지는 것 같았다. 넘어지면 넘어질수록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정말로 하루 종일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창호 형이 기진맥진 해졌을 때, 텔레비전에서 본 박치기의 왕 김 일이 했던 것처럼, 팔을 꺾어 바닥에 찐 이겼다. 창호 형이 외마디를 질렀다. 팔이 부러진 것이었다.
5.
아버지는 간만에 양복을 입으셨다. 양복을 입으신 아버지는 너무 어색해서 촌스러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내 손에 케익을 들려 창호 형네를 향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창호 형과 형의 부모님께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사과를 하셨다. 우락부락한 한 남자의 입에서 그렇게 미안해하는, 걱정스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아버지는 못 박힌 검은 손을 두드러지게 해주는 새하얀 봉투를 공손하게 내 놓으셨다. 그런 후,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셨다. 은은한 눈빛은 ‘네 차례이지 않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용서를 구할 때 늘 하듯이,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아버지에게 배웠던 대로 변명이 아니라 일이 일어난 그대로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형의 부모님은 내 심정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그리곤 형을 야단치시곤 나에게 사과를 하게 했다. 창호 형은 마지못해 나와 화해의 악수를 했다. 그 날 아버지와 형의 아버지는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걸으셨다.
“손에도 살이 없구나. 똘아, 내가 받은 약은 ‘힘이 세지는 약’이 아니다. 우황청심원이라는 약이다. 어쩌면 네가 너무 어려 아버지 말을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라는 한 남자가 아들이라는 한 남자에게 말해야겠다. 창호를 이겨서 기쁘냐? 어제까지 너는 매 맞는 놈이였다. 오늘 너는 동네에서 한가락 하는 놈을 쓰러뜨린 놈이 되었다. 둘 다 ‘놈’일 뿐이다. ‘힘’이라는 알량한 것을 위해 폭력을 쓰는 놈들은 남자가 아니다. 나는 내 아들이 남자였으면 한다. 나는 네가 너를 이겨서 기뻤으면 한다. 세상을 향해서 목숨 걸고 ‘자기’라는 것을 외칠 수 있어서 기뻤으면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싶게 가질 수 없는 ‘자신을 믿는 힘’을 깨달아서 기뻤으면 한다. 오늘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참 고난했지만, 피하고 싶지 않은 하루였다.”
아버지가 말을 마치고 내 손을 꼭 쥐어주자, 나는 다리의 힘이 빠지면서 땅바닥에 꿇어 앉아 버렸다. 내 손을 쥐고 있는 아버지 손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내장이 빠져나올 듯이 꺽꺽 울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울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쓸어 주었다.
“괜찮아, 힘내!”
그날 밤, 나는 ‘힘이 세어지는 약’을 아버지에게서 정말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