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궁극점은 만민함락의 구현이며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완성한 깨달음으로 모든 생명을 고통에서 빼어내서 안락安樂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민함락이란 불교적인 상호 소통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만민함락을 추구하고 이룩하기 위한 가르침이자 수행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라는 정의正義도 연기와 소통을 다르게 표현하는 명제命題인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라면 소통과 교류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게 되는 것이며, 소통과 교류의 이념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인연법이며 연기법인 것이다.
소통과 연기는 일방적인 독존獨存이나 고집固執이 아니라 상대적인 동시에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동시다발적同時多發的으로 이루어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함락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소통은 아집我執이나 권력에 지나지 않는다. 아상과 아만으로 군림하거나 지배하려고 한다면 소통은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화합과 상생相生과 발전도 이룩할 수 없게 된다.
만민함락은 발고여락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관점과 이고득락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부분의 양대축兩大軸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함락咸樂은 여락與樂과 득락得樂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안락하다는 것은 결국 안락을 주는 능동적인 입장과 안락을 얻는 수동적인 위치를 통해서 구족되기 때문이다. 보살은 중생을 발고여락拔苦與樂해 주기 위해서 보살행을 근수역행勤修力行하는 것이며, 중생은 보살을 통해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함락의 관계는 일방적인 교류가 아니어서, 중생이 보살을 발고여락하고, 보살이 중생을 통해서 이고득락하는 전환과 반전이 가능하게 된다. 고통에 아파하는 중생을 보는 것이 보살에게는 그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며, 고통을 떨쳐내고 안락을 누리는 중생을 통해서 보살도 또한 득락의 보람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이면서 중생의 득락을 느낄 수 있고, 중생의 분상에서도 보살의 기쁨과 환희를 충분히 체험하고 짐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도량道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기만 하거나 혹은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란 어떤 상황에서도 성립될 수 없으며, 주면서 받거나 혹은 받으면서 주는 상호의 교류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실행됨으로써 원만한 소통과 이상적인 관계가 실현되고 맺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중무진의 연기이며, 만민함락의 근본이념이다.
수행자는 법보시法布施를 수행遂行함으로써 재가의 불자들을 발고여락하게 되고, 재가의 불자들은 수행자의 법문과 수행을 통해서 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여 무명과 번뇌와 욕심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재가의 불자들은 재보시財布施를 실천함으로써 출가 수행자를 발고여락하게 하는 능동적인 함락을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능能의 역할과 소所의 역할을 동시에 충족하고 담당하는 자비의 보시행을 통해서 원만한 소통과 이상적인 교류가 완성되게 된다. 여락으로 득락하게 되고, 득락을 체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락을 근행勤行하여 득락하게 한다면 함락의 정토淨土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출가와 재가불자의 여락과 득락이라는 소통과 연대는 남편과 아내의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의 가족관계, 스승과 제자의 사제관계, 근로자와 고용주의 노사관계 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근로자가 모두 여락하며 득락하고, 득락하고 여락함으로써 함락을 추구하고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행동과 일과 직업을 통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나아가 인류공동체의 일원一員이라는 자리와 위치를 확인하고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소통의 원칙일 것이다.
사실 만민함락이란 스님들이 조석朝夕의 예불과 사시巳時의 불공을 봉행하면서 올리는 축원문의 한 구절이다. 이것을 매일 세 차례씩 반복하며 염불하는 것은 만민의 함락이 출가수행의 과제이자 주안점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경주傾注하며 노력할 것을 스스로에게 환기하고 독려하고자 끊임없이 확인하는 의식이며 절차인 것이다.
나는 상대를 위해서, 나아가 만민의 안락을 추구하고 달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는 가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소통과 교류의 출발점일 것이다. 또한 상대와 만민의 함락이 나의 안락이나 안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상대를 위하고 배려하는 것이 결국 또 다른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양상樣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라면, 인연과 연기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의 함락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와 소명을 감당해야만 한다. 길어야 열흘을 넘지 않는 개화기간開花其間이 있어 일 년 내내 벚꽃나무, 매화나무, 개나리, 진달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