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6일 동안거 해제를 알리는 방장스님의 주장자 소리에 법문에 참석한 스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길고 긴 해인강원 2학년의 동안거가 끝났다. 1학년 때는 길게 느낄 마음의 여유도 없었는데, 일 년의 차이를 새삼 느끼면서 방학을 맞았다. 그런데 가볍게 일주문을 박차고 나가야 할 발걸음은 그렇질 못했다. 다음 철 소임에 대한 부담과 해결하지 못한 숙제만 잔뜩 가지고 부산을 향했다.
방학을 하면 습관처럼 만나는 도반스님. 이번에도 어김없이 만났다.
“스님 다음 철 소임이 뭐예요?”
“응, 반장.”
“이번에는 그냥 한 번 모든 것을 놓아보세요…래도 다 잘 될 거예요.”
뻔히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알고 그러는지 행자 때부터 나를 너무 잘 아는 도반이라서 그런지 나의 다음 철 소임이 또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항상 의욕이 너무 강해서 옆 사람이 피곤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강원 신입생이 들어오면 2학년이 생활습의를 시키더라도 3학년 반장은 1,2학년의 생활 전반을 신경써야하는 소위 악역(?)을 맞아야 하니 나의 성격을 잘 아는 도반으로서는 걱정이 될 법도 하다. 항상 소임이 주위사람들 보다 우선이었던 ‘나’였기에… 소임이라는 핑계로 주위사람들에게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너무 부담스럽게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어떤 이들은 “힘 좀 빼라”하곤 한다. 이런 내가 악역을 맡으면 올해 강원의 신입생의 상황은 불 보듯 뻔 할게 아닌가. 다소 의욕을 내려놓고 주위 사람들을 보고 나를 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도반스님과의 짧은 만남 가운데 강한 충고를 새기며 부산을 떠나 파계사를 향했다. 우리반 입담제일의 도반이 있는 곳.. 저녁 공양 후 도반스님과 차담을 하며 대화가 깊어지자 우리의 강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습의가 무엇인가’, ‘왜 습의가 필요 한가’, ‘신입생이 들어오는 신학기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습의는 어떻게 시켜야 하는가’ 등 강원 생활 습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논의하면서 강원 생활에 대해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지난 동안거 때 강원 내에서 강원을 바꿔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나 역시 강원을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고자 적극 동참했다. 하지만 강원 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은 없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만 개선안을 만드는데 동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절에서 법답게 생활하는 것이 결코 편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데..
절에서 보통 습의라고 하면 삭발염의를 한 스님들이 행해야 할 수행일과, 행동거지, 의식 등을 배우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요즘의 습의는 저학년을 위한, 아랫반을 위한 습의로 전락해 가는 것 같다. 초심자를 위해 습의를 시키면서 윗반일수록, 수행이 무르익은(?) 선배가 될수록 행함에 있어서 습의가 몸에 배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습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다. 아니 나부터 벌써 편함에 적응해 가고 있고 시키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내게 예전의 습의는 남아 있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습의는 어떻게 시켜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너무 이상적이고 해인사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비난받을지 모르지만, 또 나 역시 실천이 미치지 못하여 생각만 앞서가는 실없는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내가 행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에게 습의라는 명목으로 시킬 것이 아니라 나부터 행하는 것은 다른 이도 따라 한다는 식의 의식전환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습의가 아니라 선배로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선행(先行)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고 몸에 배이게 하는 습의가 지금 해인사에는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힘들고 다소 부자유스러운 가운데 인욕을 배울 수도 있지만, 다소 편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인욕을 배우고 자신을 조복 받는 것이 더 큰 수학이 아닐까? 이런 분위기가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은 미래엔 진정한 수행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수행자들로 붐비는 해인강원이 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