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천순이년무인추天順二年戊寅秋 영중추부사신윤사로領中樞府事臣尹師路 승정원도승지신조석문봉명丞政院都丞旨臣曺錫文奉命 봉안우해인사奉安于海印寺 대한광무삼년기해시월이십오일大韓光武三年己亥十月二十五日 중모여구진重模與舊眞 동안우축성전同安于祝聖殿
번역 : 천순 2년 무인년(1458, 세조 4) 가을 영중추원부사 신 윤사로와 승정원도승지 신 조석문이 세조의 명령을 받들어 해인사에 세조대왕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대한제국 광무 3년 기해년(1899) 10월 25일 예전의 어진과 같이 다시금 그리어 축성전에 함께 모셔두었다.
세조의 원본 어진은 1458년에 견본채색으로 그려졌고 크기는 가로 86cm 세로는 136cm으로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세조는 자신이 저지른 죄업 때문에 불교에 많은 희사를 하고 귀의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에서도 대장경의 이안과 함께 50부를 인출하고, 대장경 판전을 중건하는 등 세조와 해인사는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즉 해인사의 중흥에 큰 공로가 인정되어 해인사에 세조의 진영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세조의 모습은 곤룡포를 입고 호랑이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 양손에는 홀笏을 쥐고 정면을 향하고 있다. 머리 위쪽에는 산개가 마치 불교 전각 안에 설치되는 천개天蓋처럼 표현되어 있으며 뒤에는 5폭 병풍이 있다. 양쪽에는 시신侍臣 2위가 홀을 들고 있고, 시신 아래에는 2위의 동자가 일월선을 들고 있다. 흔히 볼수 있는 왕의 어진과는 달리 불교적 도상을 근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홀은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패를 말한다. 세조가 세조 3년(1457)에 대장경 50부를 인출하게 된 계기는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기 위하여 신미 스님과 죽헌 스님을 감독으로 임명하여 인출하였다. 이 때 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한지 38만 9천여첩, 벼 5천석을 해인사로 보내게 하고 2월에 시작하여 4월에 인경을 마친 후 전국 명산대찰에 나누어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