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너를 좋아할 때의/ 설레임으로
따뜻함으로/ 편지를 써야겠다.
- (이해인 <편지쓰기>) -
화용 오빠에게,
아주 오랜만에 오빠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캠퍼스를 마음 가는 데로 걸었어요.
지난겨울 오죽이나 추웠던가요. 아마 날씨 탓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부터 얼굴이 떨리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어렸을 때에도 피곤하면 눈 밑이 떨리다가 좀 자고 나면 나아지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쉬면서 며칠을 보내도 얼굴이 떨리는 게 멈추지 않고 나중에는 말까지 약간 새는 거예요. 너무 놀라 한의원에 갔더니, 글쎄 한방에서는 떨리는 것은 전부 풍風이라고 한데요. 침 맞고, 약을 먹고 하면서, 오빠 학교를 걷는 것을 그만 두었지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후, 부모님이 지켜주시지 않는 고향은 추억 속의 그리움이 되었어요. 저와 제 동생들은 서울로 터전을 다 옮겨 와서 고향 소식은 알 수가 없었지요. 오빠 소식이 궁금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오빠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어요. 마음의 고향을 펼칠 때, 오빠는 내 그리움의 한 가운데 있으니까요. 오빠는 시간이 범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제 가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빠는 전혀 짐작도 못하겠지만 저는 오빠로 인해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래요, 제 첫사랑이에요. 하지만 언제나 저 홀로 배우는 사랑이었지요. 네, 짝사랑이었어요. 그런데 2년 전, 신문에서 오빠가 쓴 글을 읽었어요. 아니, 오빠의 사진을 보았어요. 제가 중학교를 졸업 할 때니까,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오빠가 고등학교 1학년 때지요. 그 후 근 40년을 바라보는 시간 속에 고1 때의 오빠 얼굴만을 새초롬히 감추고 있어서, 맨 처음에는 제가 아는 그 이름 전. 화. 용. 만이 대문짝만하게 들어 왔지요. 제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귀까지 들렸어요. 그리곤 사진을 유심히 보았지요. 많이 달라졌지만 곧 알아 볼 수 있었어요. 신문 위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어요. 늙은 여자 안에서 봄 날 찔레꽃 사이에서 부끄러워하던 소녀가 동그마니 떨어진 것이었어요.
그 때부터 집 근처, 오빠가 다니는 학교를 걷기 시작 했어요.
오늘도 늘 그랬던 것처럼 학교 건물들 뒤, 산으로 통하는 기슭까지 올라갔어요. 그리고 그곳 벤치에 한참을 앉아 해바라기를 했어요. 그 벤치 주위에는 우리가 어린 시절 동네 야산 양지바른 곳에서 지천으로 보았던 찔레꽃이 버려진 것처럼 천덕꾸러기로 자라고 있지요.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게 생긴 꽃이 나름대로 자기를 지키려고 가시를 박고 있는 것을 보면 ‘너도 나 같구나.’ 싶어 정이 가요. 찔레꽃에 여린 새순이 피어오르려고 하고 있어요. 조만간 봄비가 내리고 나면 어린 순이 단단한 가지를 비집고 나올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찔레꽃이 한창 일 무렵, 오빠를 향한 쌉쌀하면서 달콤한 찔레꽃 맛 같은 연정이 시작되었어요. 오빠도 아시잖아요, 그 시절 고향의 푸르른 보리밭에는 찬란한 햇빛이 반짝이며 쏟아졌지만, 가난한 마을 작은 집의 딸인 저는 배가 고팠어요. 아니, 아무리 이밥을 많이 먹었다 해도 저는 배가 고팠을 거예요.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엄마는 “계집애가 공부해 뭐하니, 땅이나 같이 부치자”했어요. 중학교는 제가 학교 안 보내주면 죽는다고 아버지를 협박해서 겨우 들어갔는데, 1년 후 저는 내 밑에 줄줄이 있는 남동생을 부모님을 도와 같이 길러야 했지요. 소녀들은 꿈을 먹고 자라는데 저는 꿈이 없었어요. 5월의 푸른 날 하얀 소복처럼 처연한 찔레꽃은 죽은 자의 꿈과 같은 제 꿈들이었어요. 15살 5월에 꽃을 배고파서 먹는다는 것은 비참했어요.
오빠가 카메라를 들고, ‘소녀 부대’를 거동하고, 그곳으로 온 날도 언제나처럼 배고픈 날 이었고, 늘 그렇듯이 제 등에는 막내 동생이 업혀 있었지요. 좀 떨어진 곳에서 찔레꽃을 배경삼아 오빠는 마치 감독처럼 어떤 포즈를 취하라고 지시하고, 마음에 안들 때는 몸소 자세를 취해 보여주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제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작은 새와 같은 웃음소리로 노래했지요. 오빠는 이미 우리 고향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부잣집 도련님, 전교 1등의 수재, 준수한 미남, 이런 조건을 가진 소년이 착하지 않다면 더 이상한 거겠죠. 제 짐작에 오빠는 우리 동네 여자 아이들의 첫사랑이지 않았나 싶어요. 창피해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넋을 놓고 ‘사진 찍기 놀이’를 보고 있었어요. 조금 전까지 찔레꽃은 외롭고 고통이었는데, 오빠와 소녀들이 젊고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어요. 가질 수는 없어도 그저 바라 볼 수는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빠가 저한테 카메라는 맞추더니 “너도 찍을래?”했죠. 저는 눈물이 나올 만큼 고마웠어요. 저도 그 젊음과 아름다움에 초대를 받은 것 같았어요. 고개를 끄덕였어요. 오빠는 한 아이에게 동생을 잠시 돌보라고 지시를 했지요. 그리고 저에게는 찔레나무 가운데로 들어가 서서 가지를 잡으라고, 그리고 이를 보이지 말고 웃으라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라고. 저는 다 따라했어요. 달포가 지나 반 친구가 전해준 봉투에는 그날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고 사진 뒤에는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 (릴케)”하고 싯구가 적혀 있었어요. 오빠, 기억나세요? 오빠는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거예요. 게다가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하지만 제가 바랐던 동감과 위로를 장미꽃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의 말로 해 주었던 거지요. 예전에는 어렴풋하게 오빠와 오빠가 가진 것들을 동경했었다면, 사진과 동감의 말은 제가 분명하게 오빠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지요.
중학교 졸업 후 저는 예정대로 서울로 왔어요. 구로공단 00섬유에서 16살의 여공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이종 사촌 언니와 쪽방을 같이 쓰게 되었을 때, 우리의 책상이자 화장대인 상 위에 그 사진을 코팅을 해서 세워 놓았어요. 액자에 넣으면 그 싯구를 읽을 수 없으니까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여고의 산업체 특별 학급에서 공부를 했어요. 공장에서는 일하느라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딴 생각을 하다가는 미싱에 손을 박기 일쑤여서 오로지 천과 바늘과 속도만이 있을 뿐이었어요. 학교에서는 잠과 싸우면서 공부를 하느라고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잠시 다른 생각이 들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되기 십상이여서 단지 선생님과 칠판과 책만이 있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나머지 모든 시간은 오빠 생각을 했어요. 구로의 닥지닥지 붙어있는 골목에서 하얀 별들이 지상에 내려온 것 같은 찔레꽃밭을 생각했어요. 거부와 멸시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빠가 저를 향해 말했던 부드러운 목소리를 생각했어요. 늦은 밤 건널목에서 초록신호를 기다릴 때, 왜 우는지도 모르는 눈물이 흐를 때, 내가 세상의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사는 것이 무서워서 서울역 플랫 홈에서 무릎에 고개를 박고 울음을 삼킬 때, 세상 어디에서 누군가가 지금 나를 위해 울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날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도망가지 않고 내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렇게 저는 오빠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어린 여공이었던 시간이 지나고, 제가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던 시기가 지나, 지나온 시절을 추억했을 때, 오빠가 저한테 준 것보다 제가 오빠를 덜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오빠는 아마도 저에게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고 할 테지만,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저에게 주었어요.
이제 건강도 회복되고 따뜻한 봄이 오니 오빠가 다니는 학교를 산책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오빠를 찾아 가지는 않을 거예요. 바라건대 우리가 우연히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냐고요? 5월의 찔레꽃밭에서의 우리의 만남이 제 일생의 중심이 되어줄 만큼 완전했으니까요. 짧은 인생에서 많은 만남과 이별은 미로와도 같은 삶을 만든다는 것을 지금, 이 나이가 돼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거든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찔레꽃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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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 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과정과 독일 베를린 홈볼트 대학교에서 고대서양 철학박사 과정을 마쳤다. 귀국 후 수원대,
대전대, 숭실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 에세이 <여우 아이>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