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중앙박물관에선 성철 스님 일대기 특별전 ‘자기를 바로 봅시다’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성철 스님 탄신 백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느라 원택 스님은 한참 바쁘셨다가 이제야 한숨 돌리는 참이라 하신다.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71년 봄의 일이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출가해서 백련암에 있다고 하여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큰 스님을 뵙게 되어 지남이 될 말씀 한 자락 여쭈었다. 그러자 스님은 대뜸 부처님께 만 배를 올리라고 하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을 갓 졸업한 원택 스님은 큰 스님을 뵌지 꼭 열 달 만에 백련암에 다시 찾아가 스님이 되었다.
“큰 스님 말씀대로 도를 이룰 때까진 백련암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그날부터 스님은 20년간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백련암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이 열반에 드신지 2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스님은 백련암에 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연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곰 새끼야! 하시며 늘 야단을 치셨어요. 큰 스님이 역정을 내시면 그땐 그게 큰 스님의 급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나니 그땐 왜 그렇게 스님 마음에 들게 못 했을까 후회스러워요.”
큰 스님은 왜 그토록 칭찬에 인색하고 야단만 치셨을까 생각해보면 채찍질을 하는 게 어른의 몫이 아니었나 싶단다.
“어른의 위치에서는 항상 아랫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갖고 있으니 더 이끌어주고 싶으셨던가 봐요.”
이제 원택 스님도 상좌를 두고 보니 스승의 마음이 어땠을까 가늠이 된단다. 그에 더해, 성철 스님은 선의 최고봉에 오른 어른이셨으니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셔도 무한 귀의하며 살았는데 지금 원택 스님의 상좌들을 보면 큰 스님과 같은 권능을 보여줄 수도 없는 당신의 무엇을 믿을까 싶어 되레 회의하며 산단다. 스승에 대한 여릿한 그리움이 스치는지 원택 스님의 눈이 먼 곳을 보신다.
스님들이 보통 백련암에서 2,3년을 살고나면 선방에 가기 마련인데 스님은 선방 가는 인연을 놓치고 백련암 살림살이를 하다가 결국 지금까지 백련암을 떠나지 못 하고 있다. 성철 스님의 노쇠가 느껴진 후로, 살아 계시는 동안은 백련암에서 큰 스님을 의지하고 사는 게 당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스님 떠나시면 홀가분하게 걸망 메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해야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큰 스님이 열반에 드시니 그날로 해방되는 게 아니라 만근의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스님을 모셔야 하는 더 큰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워낙 성철 스님의 역할이 컸기에 쉽게 갈무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일들을 하다 보니, 원택 스님의 삶은 큰 스님 살아계실 때 20년 모시고 돌아가시고 20년 모시는 인생이 되었다.
원택 스님은 현재 백련암의 감원이면서 부산 도심의 포교당 고심정사의 주지이면서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87년에 만들어진 백련불교문화재단은 불교 발전을 위한 연구 및 활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학자들이나 불서 역경사譯經士들에게 연구비도 지원하고 불서 출판을 통한 포교 활동도 하고 있다. 그리고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신 이후엔 큰 스님 기념사업을 함께 해오고 있다. 그리고 재단의 병 부설 기관인 성철 선 사상 연구원에선 성철 스님의 모든 학문적 작업을 맡아서 하고 있다.
“스님 열반하신 후 시봉하는 일이 더 크고 어렵습니다.”
그만큼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 큰 스님이 살아 계실 때는 심부름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당신이 잘잘못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보니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긴장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큰 스님 생전에는 야단을 맞아도 스님께 맞으니 억울할 게 없었는데 지금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고비들이 닥쳐온다. 그래서 원택 스님은 큰 스님 떠나시고 나서 인생 공부 참 많이 했단다.
“제가 요즘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성철 스님을 생전 20년 사후 20년 동안 모셨으니 저만큼 복 많은 스님이 어디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제가 큰 스님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강원에도 못 가고 선방에도 못 갔으니 도반 한 명 없는 외톨이 중이 되었습니다. 스님을 모신 공과 도반 하나 사귀지 못한 허물이 동시에 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것이 제 운명인가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택 스님에 대해 효 상좌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20년의 장기적인 기획으로 큰 스님을 찬양하는 기획가라고도 말한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20년 뒤를 보면서 살아왔겠습니까. 하루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중생인데요.”
1999년 봄에 한 신문사에서 원택 스님에게 청이 들어왔다. 큰 스님을 모시고 살던 이야기를 연재해 달라는 것이었다. 주 5일을 연재해야 하는데 스님은 워낙에 글을 써 본 적도 없고 큰 스님에 대한 추억을 메모해 놓은 것도 아니라서 기억을 떠올려서 써야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렵게 6개월을 연재하고 나니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해서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됐고 그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원택 스님은 그 책이 큰 스님의 일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위력은 대단했다. 성철 스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던 사람들이 그 책을 잃고 새로이 큰 스님에 대한 존경심을 내었다. 그러다보니 큰 스님을 따르던 신도들이 원택 스님을 믿고 다시 따라주었다. 한 여인은 스님께 다가와 감사 인사를 했다. 절에 못 가게 하는 남편에게 그 책을 읽게 하였더니 절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직장인들은 스님 덕에 허리 펴고 산다며 좋아했다. 어른을 모시는 정법이 적혀 있으니 부하직원들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엔 20세기 사찰의 세시풍속이 자연스레 담겨 있으니 좋은 자료가 된다는 학자도 있었다. 책을 읽고는 사람들이 진즉에 가서 성철 스님을 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큰 스님에 대한 태도와 불교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원택 스님은 애를 써 책을 쓴 보람이 있었다.
“책을 보면 큰 스님은 배가 고파서 출가한 것이 아니라 부잣집 장남이 불교의 진리를 찾아서 출가하여 부처님 말씀으로써 큰 도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시자인 원택이도 사연 많고 배고파서 들어온 게 아니라 공부도 할 만큼 한 사람이 기꺼이 스님의 상좌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보이지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란 인식을 심어주는데 큰 기여를 하지 않았나, 그래서 사람들에게 불교에 대한 신뢰감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를 위하고 포교하는 데에도 큰 밑천이 된 것 같아요.”
그 책을 계기로 원택 스님은 자연스레 큰 스님의 일들을 꾸려왔다. 그러니 혹자들의 눈에 장기적인 흥행 기획가처럼 보인다는 게 만부당할 따름이다.
스님은 불서 역경사譯經士를 길러내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한글화가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 자문 했을 때 우리는 맹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단다. 스님이 20년 전에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출판사인 장경각에서 ‘선림고경총서’ 37권을 출간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부분이다.
“우선 한문을 떠나선 안 되는데 벌써 한문을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발등을 찍는 일이 아닐 수 없어요. 팔만대장경이 빨래판으로 남아 있으면 그걸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스님은 큰 스님이 계실 때부터 번역 작업을 시작 했으나 아직도 책으로 만들지 못한 중국 송나라 때의 ‘오등회원五燈會元’을 완성하는 것이 큰 숙제라 하신다. 초고를 완성한지가 20년이 되었으나 좋은 글이 좋은 학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스님은 좀 더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오등회원을 이 시대에 맞는 한글 번역으로 완성시켜서 회향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리고 오등회원이 잘 번역되면 새로운 번역 연구원을 만들어서 물적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앞으로 큰 스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큰 스님이 늘 말씀하시길, 중은 논두렁 베고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선방에 다니며 참선하다가 죽으란 말씀이지요. 그런 사람이라면 무소유라 할 것도 없이 이미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진 게 많으면 어찌 논두렁을 베고 죽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제가 논두렁 베고 죽을 수 있는 무소유의 중이 아니라 괜스레 스님 위한답시고 이 일 저 일 한껏 벌려 놓았으니 수습해 놓고 가는 것이 논두렁 베고 죽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마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스님 20주기를 마치고나면 기념사업도 갈무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신다. 인위적인 작업으로 큰 스님을 모시기엔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이젠 세월과 역사에 남겨야 하지 않겠나, 이젠 역사 속에서 큰 스님의 위치가 정해져야 하지 않겠나 말씀하신다.
성철 스님은 많은 한글 법어를 남기셨는데 원택 스님은 그중에서도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법어를 당신도 좋아하셨다고 마음에 꼽으신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금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살아야지요. 그것을 알고 실천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자기를 바로 보아 자신이 금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살자는 것이 큰 스님이 늘 선사로써 우리 중생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주관 없이 흔들리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꿋꿋하게 쇠심줄을 세우게 하는 말씀이다. 한눈팔고 걷는 내게 멀리서 큰 스님의 야단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원택 스님이 그 뒷덜미에 한 마디 더 얹으신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그러더니 자리를 툭 털고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어가신다. 후다닥 정신 차리고 여쭙는다. 어디 가십니까?
“시자의 짐 내려놓고, 큰 스님 말씀대로 참선하는 것이 제게 남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