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이 칠판에 ‘가을’이라는 주제를 적자, 여기저기서 수험생들의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문 사설을 읽고, 시사 현안에 대한 글을 써보며 논술 시험에 대비했었는데, ‘가을’이라니.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글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했던 주제가 나오니 역습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를 굴리다 겨우겨우 종이를 채우고 시험장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봄’이란 주제 앞에서 나는 그 때보다 더 막막함을 느낀다. 2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며 무미건조한 글만 주로 써왔으니까. ‘봄’보다는 차라리 ‘황사의 피해’나 ‘기후변화’에 대해서 쓰는 게 쉬울 것 같다. 게다가 그 동안 ‘가을’이건 ‘봄’이건,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는 감수성도 퇴화한 모양이다. 40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걸 나이 때문으로 돌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봄에 둔감해진 것도 이 나이 탓인지 모른다.
‘봄’은 새 출발의 계절이다. 새 학년의 출발점은 봄이 시작되는 3월이다. 자연의 변화도 변화지만, 새 학년의 시작이라는 큰 ‘이벤트’가 매년 일어나니, 봄은 학생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계절이다. 그러고 보면 삭막한 도심에서 생활하고 더 이상 학생도 아닌 지금, 예전보다 봄에 무감각해진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나마 요즘 내게 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학기 시작이나 입학 같은 것들이다.
올 봄에 큰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아이는 요즘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부쩍 신경질과 짜증이 늘었다. 가족들과 대화도 줄고, 제 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낸다. 가끔 뭐하나 싶어 방을 들여다보면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흥얼거리고 있을 때가 많다. ‘뭘 그렇게 듣니?’ 하면 ‘뭐라고 하면 엄마가 알아?’ 하고 핀잔을 준다. 인생의 봄이라 할 시기, 마음껏 즐겨도 모자랄 터인데 왜 저럴까.
그런데 걱정하다가 돌이켜 보니 나도 예전에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10년 넘게 살던 집을 처분하고 낯선 동네로 이사했다. 나는 겉으로는 잘 지냈지만, 별 이유 없이도 답답하고 우울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실에 있던 오디오로 녹음한 테이프 몇 개를 닳도록 돌려 들었는데, 이 때 가장 즐겨 듣던 음악이 우연히도 ‘봄’이라는 이름이 붙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이었다.
‘봄’이라는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답답하고 우울했던 마음도 이 곡을 들으면 좀 풀리곤 했다. 화사하고 생동감 넘치는 멜로디는 정말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다가도 가끔씩 내 방을 들여다보는 엄마한테는 퉁명스럽게 대했다.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왜 참견이야,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의 ‘사춘기’도 그랬던 것이다. 딸이 지금 듣는 음악 중에서도 봄 노래가 있을지 모른다.
‘사춘기’라는 말에는 ‘봄(春)’이 들어있다. 2012년의 봄날, 오래 전 내가 희망과 혼돈 사이를 오가며 지냈던 인생의 봄을 내 아이도 지금 겪고 있는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바로 엊그제 같지만, 인생의 봄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딸은 사춘기를 지내며, 때로는 아픔을 겪더라도 성장해 갈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사춘기 딸을 통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은 셈이다. 예전에 듣던 베토벤의 음악도 이제 조금은 달리 들린다. 베토벤이 귓병이 악화되면서 절망에 사로잡히곤 하던 시기에 밝고 사랑스러운 이 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생의 봄을 훌쩍 떠나 보냈지만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던 베토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이 곡에서 문득문득 애상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해가 갈수록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한다. 청춘이 그렇듯이 짧아서 더 아름답고 눈부신 봄. 더 이상 나이 탓 하지 말고, 이 봄이 가기 전에 아이와 함께 봄을 즐겨봐야겠다. 베토벤의 ‘봄’ 소나타든, 아이가 요즘 즐겨 듣는 노래든, 같이 들으면 좋겠다. 자연이 선물하는 봄의 아름다움도 느껴봐야겠다. 지난해 해인사의 선원 개방을 취재하며 꼭 가족들과 다시 와야지 다짐하고는 아직까지 그러지 못하고 있는데, 봄날의 해인사도 꼭 찾아보고 싶다. 그러면 ‘봄’이라는 주제를 받아 들고 무뎌진 감수성과 나이를 탓하며 막막해 하는 일도 없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