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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사 주지 세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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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2년 02월 360호

일요일 오후, 스님은 목간을 갈까 하던 참이셨다. 고즈넉이 앉아 차를 달이는 스님 뒤엔 자운 큰 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고 방안의 화초 몇 그루는 겨울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말없이 차를 내어주시는 스님은 얼마 전에 은사 스님인 지관 스님이 입적하신 터라 마음이 헛헛하신가.
“우리 스님이 가시고 나서 내 맏 상좌인 현종 스님도 갔어요. 내 주변 사람들이 다 갔네. 내가 노릇을 잘못해서 그런가….”
그러고는 한참동안 말씀이 없으시다. 지관스님의 맏 상좌였던 세민스님은 또 당신의 맏 상좌를 지병으로 떠나보냈으니 허전함과 쓸쓸함이 어찌 없을까. 스님은 한 마디 더 보태신다.
“우리 스님은 자랑거리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스님은 지관스님과 세속 나이로는 여덟 살 차이지만 스님으로써 그토록 완벽한 스님은 없을 것이라며 말씀을 이어가신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분이고 공사 구분이 분명하신 분이고,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살아오신 모습을 보면 나무랄 데가 없지요.”
세민 스님은 추억에 젖어 그 시절의 일화들을 풀어놓으신다. 지관 스님은 제자들에게 지시를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단다. 아침 공양을 하고나면 마당을 쓸기 위해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나오셨고 마당의 풀을 뽑는 일에도 제일 먼저 허리를 숙이셨고 밭을 매러 갈 때도 제일 먼저 호미를 들고 나오셨단다. 한 번도 잔소리를 하지 않고 승려 생활을 몸소 보여주셨다. 해인사에 주지로 계실 땐, 서울에 출타 하실 일이 있어 여비를 드리면 지출의 목록을 적고 남은 돈을 가져다 주셨단다. 동국대 교수로 재직 시 경국사에 살 땐, 당신 방에서 쓴 전화요금은 사중 돈으로 낼 수 없다며 개인 돈을 꺼내놓으셨단다. 그만큼 공사 구분이 정확하신 분이었다.
“우리 스님은 다방면으로 다 갖춘 분이었지요. 율사, 강사여서 학장, 총장까지 하시고 행정능력까지 갖추셨으니….”
율사였던 자운 노스님은 지관 스님을 교육시키기 위해, 계율은 당신이 직접 가르치시고 운허 스님을 강사로 모셔 전강을 받게 하고 행정은 영암스님께 배우게 했다. 그러니 세민스님은 지관스님이야말로 승려로서 모든 것을 갖춘 스님이라 말씀하신다.
스님이 지관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56년도의 일이다. 17세에 외할머니를 따라 정읍 내장사에 갔다가 불교와 인연을 맺었고, 해인사로 가서 지관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해인사에서 우리 스님 모시고 자운스님, 영암스님, 지월스님, 일타스님 모시고 살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스님은 그 시절이 많이도 그리우신지 자운스님의 사진을 배경으로 하고 앉아 한참동안 말씀을 머뭇거리신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강원을 졸업하자마자 천축사 무문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부가 다 차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순간 스님은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서 그 춥던 겨울에 강화 보문사로 향했다.
“기도하다 죽으면 어떠냐 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었어요.”
보문사는 굴법당 중심으로 기도하는 사찰이었다. 스님은 21일간 하루에 12시간씩 굴법당에서 기도를 했다. 무문관에 간다고 나섰다가 방향을 바꿔 간 것이니 옷을 준비해 가지 않아 추위에 떨어야 했다. 어느 날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7일간 절만 하던 한 스님이 누비옷을 벗어서 등에 씌워주고 사라졌다. 굴법당에서 21일간 기도를 마치고 다시 기도를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섰는데 흙과 짚을 얽어 발라 올린 조그마한 법당이 기울어져서 벽의 틈에서 바람이 들어오니 물도 금세 얼어버렸다. 그곳에서 50일 동안 기도를 하고나자 스님은 앓아누웠다. 방에 불을 잔뜩 때고 그때 그 스님이 주신 누비옷을 입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말끔하게 나았다. 그래서 스님은 100일 기도를 다 마칠 수 있었다. 기도를 마치고 나와서도 그 스님에 대한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수 해가 흘러 그 스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비단에 명주솜을 넣어서 선물해드렸는데 그 스님은 그것을 또 남에게 주셨다고 했다.
“100일 기도를 하고나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어요. 지금도 그때 그 복으로 사는 것 같아요.”
스님은 어른 스님들의 뜻을 따르느라 서른이 다 되도록 대학에 가지 못 했다. 밖에 나가서 신지식을 배우는 것을 마뜩지 않게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스님들이 외국에 다니는 것을 보니 내전 외에 외전도 필요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 교토에 있는 불교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스님이 멀리서 공부를 하는 동안 지관스님은 스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 졸업을 하자마자 돌아와 경국사에서 지관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러면서 동국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러고 나자 총무원에서 재무부장을 맡기는 터에 스님을 모시고 살지 못 하게 됐다. 그때 처음으로 지관스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때 모시고 살지 못 했던 걸 지금 후회해요. 불교사전을 시작하실 때였는데…. 그때 이미 스님은 10여년 가까이 자료를 전부 모으고 계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중요한 자료가 다 있기 때문에 거기에 살만 붙이면 되요.”

스님 곁에서 살다보니 선방에 갈 기회가 없었단다. 그러고는 남들은 1년도 살기 힘들다는 총무원 재무부장을 10년을 살고 조계사, 해인사, 수안사, 삼성암 주지를 살며 지관스님 곁에서 맴돌다보니 지금껏 서울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스님은 헛헛한 웃음을 웃으신다.
“나는 선사로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지금도 그런 생각이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날 염불하는 스님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일본 유학 시절, 곁에 있던 한 스님에게 서울에서 자꾸만 천수경을 녹음하자는 청이 들어왔는데 그 스님은 세민스님이 염불을 더 잘하니 그것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세민스님은 한국에 잠시 나왔다가 천수경을 녹음하게 됐다. 77년도 그 당시엔 김성공 스님의 천수경과 금강경이 3년째 전국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불자들이 또 다른 스님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던 즈음이었다. 그래서 세민스님의 테이프는 전국 곳곳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불자가 있는 세계 곳곳으로도 다 퍼져나갔다. 그러다보니 세민스님은 염불하는 스님으로 크게 알려졌다.
“신라 시대의 한 스님이 염불하는 스님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는 나도 그런 스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 바람 때문인지….”
따로이 염불을 배운 것은 아니다. 해인사에 살 때 영암스님은 아침 저녁마다 당신 방에서도 예불이 끝나고 장경각을 돌면서도 당신이 외우고 있는 걸 다 외셨다. 당신이 외운 걸 안 잊기 위해서 늘 그렇게 하셨는데 그것을 세민스님이 신심으로 주워 담았다. 그렇게 배웠으니 스님도 그것을 잊을 리 없다.
세민스님이 해인사에 주지로 갔을 땐 당장 빚이라도 얻지 않으면 먹고 살기도 힘든 상태였다. 워낙에 살기 어려운 절이라서 모두가 6개월도 못 버티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껏 기도만 하며 살아왔으니 1029일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반대했다. 그러나 눈 내리는 그 겨울에 입제를 했는데, 테이프 염불로만 들었던 세민스님을 만나기 위해서 수천 명의 신도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렇게 해서 해인사 주지를 하는 동안 8600여 명의 신도가 접수를 했다. 스님은 걱정 없이 4년을 채우고 나왔다. 해인사와 조계사에서 주지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염불을 했더니 스님은 더더욱 염불하는 스님으로 알려졌다.
“전생에 외던 것이니 본생엔 하기가 좀 쉬운 거겠지요.”
스님은 전생에도 스님이 아니었을까 하신다. 스님이 되고 나서야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태몽을 생각하니, 전생에 중노릇을 제대로 못해 금생에 다시 스님이 되었나 싶단다. 스님은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태몽을 꿈결처럼 살포시 들려주신다. 나이 먹은 스님과 젊은 스님이 집을 찾아왔는데, 젊은 스님은 바랑을 짊어지고 나이 든 스님은 바루를 들고 왔더란다. 할머니가 대주 밥그릇에 쌀을 담아 드리려는데 젊은 스님은 부엌 문 앞에 가만히 서 있고 나이 든 스님은 부엌으로 들어와 솥을 가만히 안아보란다. 그러더니 쌀은 받지도 않고 홀연히 사라지더란다. 스님은 그 나이 든 스님이 당신 자신이고 젊은 스님은 직지사에 있는 친 동생 법보 스님이 아닌가 싶단다.

스님은 주지 소임을 살아도 총무원 소임을 살아도 공부를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해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 그것이 스님이 살아온 이야기의 전부다.
“어디에 살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걸 은사 스님한테 배웠어요. 스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혀서 살았지요.”
먼 곳의 사람이 그리워지는 저녁 무렵, 스님께 여쭙는다. 곁에 없는 사람이 하염없이 그리울 땐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울 땐 다른 게 없지요. 수행자는 수행을 해야지요.”
나무가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잎과 꽃을 틔우기까진 산통과도 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러니 이 겨울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수행자는 가없는 수행의 눈길을 부단하게 걸어가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