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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학교 총장 벽봉碧峰 부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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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 템플 - 최현태 2011년 12월 358호

이미! 벌써! 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어느새 12월이다. 어느 시인은 \'혼돈 속에서도 많은 것을 이룩하고 많은 것을 쌓았으니 지는 해를 향해 서서 다시 한 번 생각할 때…라지만 이룬 것도 쌓은 것도 도무지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이럴 때는 그저 잘 살아 온 사람을 만나 그의 기운으로 채찍을 삼아도 좋으리. 그 옛날 원효 스님이 천명의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하고 그 인연으로 모두 성인이 되었다는 그곳 천성산 기슭이 품은 경남양산의 영산대학교를 찾았다. 부구욱 영산대학교총장을 만나러가는 길, 청춘의 에너지가 캠퍼스에 가득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원융하여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홍익인간, 원융무애를 건학이념으로 하는 영산대학교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두루두루 원만하여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 서로 융화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부처님가르침이 귀하고 또 귀하다. 분초를 나눠가며 쓴다는 그이의 다음 일정이 빡빡함을 전해 듣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내었다.
-건학이념을 홍익인간 원융무애라 정한 것은 어떤 인연인가요?
“자리이타정신을 추구했지요. 제가 그 때는 공직자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는데 학교 설립자이신 어머니께서 제 의견도 물으셨습니다. 자리는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여 얻는 자유로 원융무애정신과 통합니다. 이타는 보살도의 핵심개념으로 홍익인간과 연결되지요. 이 건학이념은 지금 제가 이해하는 만큼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해졌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오묘하고 불보살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총장실을 찾아 학교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 대성암이라는 이정표를 본 듯하여 주변에 혹 암자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천성산이 원효성지로 제1봉이 원효봉이고 제2봉이 비로봉입니다. 그리고 학교 앞으로는 와불臥佛산과 배읍拜揖봉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이 누워계신 뒤편으로 학교가 자리한 것이 불경인 것도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법신 비로자나불의 인연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영산대학교가 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이에 따른 문헌적 근거를 찾아봐야할 것 같습니다.”
신라시대 원효 스님께서는 89개의 암자에서 천명의 대중에게 법을 설하시니 천명의 성인이 났다하여 천성산이라 이름 한 곳에 자리 잡아 21세기를 이끌어갈 천 여 명의 청춘들이 공부하는 영산대학교는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리라. 천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우뚝한 천성산 아래로 만년을 이어 온 바람이 교정을 오르내린다.
공직자에서 교육자로
영산대학교 총장 부구욱, 그이는 1981년 부산지방법원판사로 시작하여 2001년까지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로 재직하던 중 같은 해 2월 설립자인 어머님 뒤를 이어 영산대학교 2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부산중학교와 경기고등하교 서울대학교로 진학하는 동안 그 흔한 재수 한 번 안하고 사법고시 합격하여 공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성공한 삶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살면서 부딪혔던 어려움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요?
“살면서 크고 작은 굴곡은 누구나 겪게 되지만 대학총장 부임이후 로스쿨 선정의 실패와 좌절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른 대학에 앞서 로스쿨방식의 학부교육을 시행했고 시설과 교수진 등에 투자를 많이 하고 훌륭하게 준비했지만 합당하지 못한 이유로 탈락했지요. 이런 현실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대학체질을 강화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 최근에 사시합격자 2명을 배출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면서 실패와 좌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
이 사람의 인생에는 갈피마다 충실한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다. 뭐 특별한 건 없을까하고 이리저리 이야기를 몰아가는데 드디어 한 건이다. 영산대학교 홍보를 하러 다니던 중에 만난 어떤 이가 묻더란다. 영산대학교가 그렇게 좋으면 총장님 자녀를 영산대학교에 먼저 보낼 수 있느냐고.
“그 자리에서 내 문제가 아니니 확답은 못하지만 설득은 해 보겠습니다..하고 집에 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죠. 아내와 진학을 앞둔 딸아이 모두 반대를 했습니다만 의논 끝에 고맙게도 우리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지금은 로스쿨에 다니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학교를 선호하는 이 시대에 부모도 자녀도 쉽지 않았을 선택이었으리.
-가진 사람, 배운 사람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성장과정 속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구신 부모님의 경제적 혜택을 받으면서 학업에만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입니다.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 왔던 터라 법관에서 변호사가 아닌 대학총장의 길을 택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나의 길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너무하다 싶을 만큼의 모범답변이다. 어쩔 수 없다. 그이의 삶이 그러하므로. 그래도 우리는 그이의 이런 반듯한 모양새를 보고 닮아갈 수는 있으니. 찬불가<우리도 부처님 같이>를 즐겨 부르는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스승은 없고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만 있다는 이 시대에 총장님의 역할은 어떤 것이라 여기시는지?
“영산대 모토가 ‘내 인생의 스승을 만납니다’와 ‘훌륭한 스승이 인재를 만듭니다’입니다. 총장의 역할은 모든 교수님들이 훌륭한 스승에 부합하도록 지원하는 일입니다.”
지원도 소통이 있어야 하는 법,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같은 방향에서 지혜를 모아가는 과정이라 여기는 그이는 학생과 교직원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여 늘 열려있는 총장실이다.
롤 모델이 있었기에 고민도 망설임도 없었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부구욱총장의 7촌 재당숙어른을 만나러 갈 때마다 아들과 동행했다.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선산군수를 지낸 부완혁선생은 해방 후 미군정 때부터 고려대학교 법과교수와 국가관료, 언론인, 경영인으로 사신 분인데 부총장이 공부하는 자세와 법관의 길을 가는데 있어 롤 모델이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님은 내심 경영을 공부하길 바라셨지만 그 어른을 보면서 법대로 진학하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다수의 외국어에 능하시고 품성이 훌륭하셔서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요.”
늘 서릿발처럼 깨어 있는 정신의 향기를 이르는 말이려니. 반백의 신사 부구욱총장은 말 그대로 신사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이에게서 받은 인상은 당당함보다 오히려 겸손과 배려 쪽이 가까웠다. 기분 좋은 만남이다.
“좋은 평가 고맙습니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배움의 자세를 가진 것이 겸손으로 비쳐질 수 있나 봅니다. 상대를 이해하다보면 나를 이해하게 되고 상대 역시 비슷한 모습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스승은 당당하되 비굴하지 말고 겸손하되 교만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한 번 더 새겨 볼 일이다.
진리와 삶의 지혜 반야심경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님을 따라 고등학교 다닐 적에 이미 통도사 극락암 철운스님 방에서 한 달간 머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혔던 그이이기에 건학이념에 불법이 스며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법보종찰 해인사는 어떻게 기억될까?
“역시 어머님 인연으로 시작되었지요. 3천배를 올려야 친견할 수 있었던 백련암 성철스님을 뵈러 다니는 동안 해인사는 아주 친근한 도량입니다.”
임제선원 종성 스님께 받은 벽봉碧峰이라는 법명이 잘 어울리는 그이는 인생의 진리가 담겨있고 삶의 지혜로 다가오는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空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좋아하는 가르침으로 꼽았다.
12월의 청랭한 바람 맞으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염한다.
다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연재를 마치며-
3년이 넘도록 매달 빈 모니터와 대면하는 괴로움이 컸지만 삶의 곡진함까지 내보여 준 아름다운 그들이 있어 이만큼 올 수 있었습니다. 귀한 인연입니다. 모두 청안청락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