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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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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1년 12월 358호

자그마한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갤러리가 있는 더 자그마한 절집이다. 그 갤러리 한켠의 손바닥만한 햇빛이 들어오는 차방에 앉아 차 한잔 하고 가라 하신다. 차방에 앉으니 손때 묻은 다탁과 다기들이 놓여 있고 오래된 글씨들이 걸렸고 들꽃을 꽂아놓은 작은 꽃병과 다감한 목침이 보인다. 단출하고 정갈한 스님의 생활이 엿보인다.
“이 꽃병 좀 보세요. 참 아름답죠. 그런데 꽃병만 보면 참 못났어요. 꽃병만 놔두면 아무도 좋단 소리를 안 해요. 근데 이 꽃병은 아무 꽃이나 꽂아도 아름다워요.”
스님 말씀대로 꽃병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손으로 아무렇게나 주물러놓은 듯한 모양새다. 울퉁불퉁하니 참 못 생겼다 싶은데 거기에 들꽃이 꽂혀 있으니 그게 참 묘하게 어여쁘다.
“자기를 낮춰서 상대를 올려놓으니 다시 자기가 돋보이는 것이지요. 그 낮춤이 훌륭해 보이지요.”
아무도 보지 않는 후미진 구석에 놓여 있던 꽃병을 가져와 꽃을 꽂았더니 이제 사람들은 꽃이 아닌 꽃병 이야기만 한단다. 그러면서 스님은 말씀하신다. 특별할 것 없이 사는데 무얼 하라 찾아왔느냐고,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홍시도 찔러보면 익은 만큼 들어가지요. 수행이란 것은 자기를 잘 익어가도록 두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설익은 것을 함부로 드러내고 함부로 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경계해야지요. 어찌 보면 수행은 똑똑해지는 공부가 아니라 멍청해지는 공부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수행이란 것을 많이 배워 똑똑해지는 것이라 알고 그것을 상으로 드러내곤 한다. 그러니 수행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할수록 똑똑해지기는 해도 겸손하지 못한 경우들이 많으니 그것이 과연 알짜배기 수행일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늘 곁에 저 하심下心의 꽃병을 두고 계시는가, 그리고 저 혼자 잘나서 사는 내게 저 꽃병을 좀 보아라 하시는 게 아닐까.
“저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우리 신도들에게 경 이야기를 해줄 수도 없고 수행 방법을 가르쳐서 도를 깨치게 해줄 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린 딱 하나만 알면 될 것 같아요. 향을 꽂을 때의 지극한 마음.”
우린 법당에 들어가 촛불을 켤 때 향을 꽂을 때 삼배를 할 때, 그 순간만큼은 지극한 마음을 낸다. 몇 초도 안 되는 그 순간만큼은 온 마음을 담는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고 법당에 앉으면 그런 지극한 마음이 스르르 엷어져 버린다.
“그 지극한 마음이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이지요. 그 마음이 지속만 된다고 하면 미워할 일도 없고 다툴 일도 없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지요. 지극한 마음을 내는 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갤러리엔 스님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다. 붉고 푸른 색이 화폭을 가득 메우는데 그것이 묘하게도 마음을 들뜨게 하지 않고 온화하게 만든다. 마치 뜨듯한 불덩이가 몸 안에 들어앉는 듯하다. 그리고 굴곡진 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부정형의 면들은 자연의 숨결을 닮았다. 그러니 그것이 또 한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것은 수행자의 그림이기 때문이 아닐까.
“화두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 밑천이 없으면 그림도 못 그리지요.”
화단에서 자리매김을 한 스님은 여러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회 때마다 인사말이 간단하다.
“이게 제 얼굴이고 제 마음입니다.”
바쁜 마음에 바쁜 걸음이 나오듯 정성스런 마음에서 정성이 담긴 그림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단박에 알아보기 마련이다. 그러니 수행자의 그림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도 스님은 화집의 한켠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삼라만상이 다 그림인데 무엇을 또 그릴 것이 있겠는가 / 古人의 먹빛은 검되 맑고 희어 보이는데 / 내 그림은 번뇌만 흩어진 듯 하네 / 언제나 군더더기 다 떨어져 / 한 붓을 들어 만 사람의 마음을 적실 수 있으려나’
사람들은 스님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특별하게 바라보고, 스님이 그림을 그리니 바쁘지 않느냐고 곧잘 묻는다. 그러나 스님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차를 마시고 마당에 나가 풀을 뽑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그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스님으로 충실히 살면서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그리니 바쁠 리도 없다.
“나는 수행 삼아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아요. 기도 할 땐 기도에 충실하고 그림을 그릴 땐 그림에 충실할 뿐이죠.”
일상생활도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행 아닌 것이 없다지만, 스님은 스님 생활 외의 다른 생활을 한다는 게 되레 부끄럽다. 열심히 그리다보면 그것이 수행이 될 수는 있겠지만 수행 삼아서 그림을 그리진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저 스님은 차 마시듯 그림을 그릴 뿐이고, 그 모든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전시회를 하고 나서의 어떤 평가에도 흔들림이 없다. 전시회가 끝나면 또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목탁치고 풀 뽑아야 하니 거품이 들어갈 여지를 두지 않는다. 거품이 빠질 때까지 기도도 그림도 제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평가일수록 더 경계한다. 그것은 욕심을 비울 때에 가능하다.
“어부가 강에 그물을 던진다고 해서 그 강의 고기가 절대 다 안 잡혀요. 빠질 건 빠지고 걸릴 건 걸리지요.”
좋은 얘기를 듣는다고 해서 금방 대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란 말씀이다. 그것은 그저 자신이 고기를 다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즉 자신에게 속아 있을 뿐이란 말씀이다. 그러니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늘 유심히 보아야만 한단다.
“끊임없이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나를 보지 않는 시간은 죽은 시간, 즉 허망한 꿈일 뿐이지요.”
스님은 그림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배우려 하지도 않았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배우면 길들여진 집토끼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허나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하셨던 ‘눈과 귀는 열어두고 입은 닫고 살라’던 말씀이 스님에겐 큰 스승이 되었다. 눈으로 유심히 보고 귀로 유심히 듣고 사니 자연스레 균형적인 사고가 생겼다. 그래서일까 유독 법관스님의 그림은 균형감이 뛰어나다.
“난 아직도 그림에 대해선 몰라요. 그저 내 그림은 내 방식대로 균형을 맞추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모든 것은 균형이 깨질 때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그게 언제쯤일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후엔 그림에서 손을 놓을 생각이다. 명예나 이익을 좇은 것이 아니니 원래의 마음, 열심히 수행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저 이따금 먹으로 그림을 그려 윗목에 놓아두었다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한 장씩 주는 낙이나 있으면 그만이겠다.
“스님이 스님답게 살아야지요.”
늘 자신을 보며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아내는 아내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혼자이지 못 하고 무리 속에만 있으려고 하니 서로에게 기댈 뿐 자신을 바라볼 겨를이 없다.
“철저하게 혼자일 때 가장 자유롭고 수행이 잘 되지요. 인간은 철저하게 외로워야 합니다. 바람 소리 들어봤어요?”
스님과 차를 마시는 내내 창밖에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도 바람이 윙윙대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었고 오늘도 바람이 창문 틈을 지나느라 쉭쉭 소리를 냈다. 그런데 스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라고, 그저 바람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일 뿐이라고.
“자신이 아주 고요해지고도 고요해져서 바람 소리보다도 더 고요해지면 그 때에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수행을 해야 하겠어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보며 고요해져야지요.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처럼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도 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캄캄한 가을밤의 어둠으로 사라지는 내게 합장을 하면서도 밖의 소리가 없는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신다. 이제 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 하겠다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길을 오래도록 걸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