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무명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간간삼아간 부이사바하.”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간간삼아간 부이사바하”
“아니, 자네들 지금 무슨 주문을 외고 있는가? 나도 남산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다니고 있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괴이한 다라니네그려”
“그건 그럴 수밖에. 불경의 다라니가 아닐세. 한데, 자넨 여태 소문을 듣지 못한 게로군.”
“그래 무슨 일인가?”
“글쎄, 누군진 모르지만 오늘 새벽에 다라니처럼 만든 글을 적어서 서라벌 대로마다 뿌려 놓았대.”
“임금의 행차가 있는 거리는 물론이거니와 각 성문에도 써 붙여 놓았다는군.”
“해서, 지금 서라벌 백성들 사이에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간간삼아간 부이사바하’란 주문이 바람처럼 퍼지고 있다네.”
“왕과 소판들, 죽은 각간 위홍과 그의 아내 부이부인 같은 이들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는 말일세.”
“하긴 그렬 법도 하지. 선덕여왕 같은 어질고 현명한 여왕도 있었는데, 지금의 여왕은 위홍이란 자와 사통(私通)했다는 소문이 분분하질 않나, 그자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추시(追諡)까지 하질 않나.”
“그뿐인가 어디, 왕의 어릴 적 젖어미였다는 그 자의 아내 부이라는 여자가 권세를 휘어잡고 있질 않은가? 그런 소리가 안 나올 수도 없지.”
“더군다나 잘 생긴 소년들을 대궐안에 들여다 놓고 해괴한 짓거리를 일삼는가 하면 그들을 요직에까지 앉히니 나라 꼴이 어찌 되겠나.”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망국의 징조가 나타난 게지. 지난 번엔 사량리 (沙梁里)의 바윗돌이 저절로 나다녔다질 않던가? 더구나, 멀리 지방에서는 토호(土豪)들이 중앙의 말을 듣지 않고 제각기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다질 않던가.”
2
진성여왕의 실정 (失政)을 비판하는 투서와 괘서가 서라벌의 민심을 뒤흔들었다.
이 때가 진성여왕2년(A.D.888년). 대궐에서도 왕과 권신(權臣)들이 모여 괴 다라니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부심하였다.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난 밤 역신(逆臣)의 무리가 허황하고도 괴이한 주문을 써서 길거리에 뿌리고 성문에 내걸었음을 삼가 사뢰는 바이옵니다.”
“그래, 어떤 말이 적혀 있더란 말이오?”
“그것이…저어…”
“어서 말해보오.”
“황공하옵니다.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干干三阿干 鳧伊娑娑詞’ 라 적혀 있었사옵니다.”
“무슨 뜻이란 말이오, 그 주문이?”
“‘나무’ 와 ‘사바하’ 란 말은 불가의 주문에 들어가는 말로서 대개 처음과 끝에 오는 말이옵니다. 그리고 ‘찰니나제’는 마마를 가리 킨 말이며, ‘판니판니 소판니 간간삼아간’은 두 소판이 오며, ‘부이’ 는 혜성대왕의 부인 부호(鳧好)부인을 일컫는 줄로 사뢰옵나이다.”
“결국 마마와 각간, 각간의 부인 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뜻이니 이것은 백성을 선동하여 권력을 차지하려는 역신(逆臣)들의 계략이옵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이 따위 계략을 짜냈단 말인가?”
“당장 그 자를 잡아 죽여야 하나이다. “
“나무 사바하라고 했으니, 필경 절에 사는 중들의 소행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아니, 불교는 호국의 종교로서 왕실을 위해 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뿐더러 내가 즉위한 지난 해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 법회를 열어 은혜를 베풀었는데 어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예. 사실이 그러하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일부 불순한 역신들이 자기네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의 주문 형식을 빌어 쓴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또한, 주문처럼 만들어져 백성들이 읽기 쉽고 외기 쉬워 더욱 빠른 속도로 전파될 위험성이 있나이다. 어서 주동자를 붙잡아 죽임으로써 백성들에게 경계심을 심어 주어야 하옵니다.
“중들이 한 짓이 아니라면, 유학(儒學)을 배워서 귀족정치를 비난하면서 골품제에 반대해 온 육두품(六頭品) 세력들의 소행이리라 생각됩니다. 대야성 (大耶城)에 사는 왕거인(王巨仁)이란 작자가 그 세력의 대표이옵니다. 하오니, 속히 그를 잡아들여야 하옵니다.”
“그렇다면, 어서 왕거인이란 자를 잡아 오도록 하라. 그리하여 더 이상 불경하고도 괴이한 소문이 떠돌지 않도록 하고, 누구를 막론하고 그 주문을 외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엄한 벌에 처하도록 하라.”
3
그리 하여 대야성 (지금의 합천)에 사는 선비 왕거인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온다.
“그대가 사주하여 불온, 불경하고도 괴이한 소리들이 백성들의 선량한 마음을 어지럽혔으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마마의 총애를 받는 몇몇 간신들이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니 기강이 문란해지고, 게다가 기근으로 백성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하고 있으며 도적은 벌떼같이 일어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뜻있는 선비라면 어느 누구라도 근심치 않을 수 없을진대, 저라고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그 주문은 제가 지은 것이 아니옵니다.”
“임금과 대신들에게 불만이 많고 학식 뛰어난 그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토록 교묘히 주문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옥에 갇혀 장차 형벌을 받을 운명에 놓인 왕거인은 길게 탄식한다.
‘나라의 임금이 어질지 못하고 신하들이 충직하지 못하여 아무도 백성을 생각지 않으매 배운 자가 백성을 위해 한 목숨 버린다면 억울할 것도 없겠으나, 행하지도 않은 일을 누명씌워 죽이려 하니 이 무슨 변괴인가?’
두 눈에서 눈물 흘리며 왕거인은 시를 읊는다.
억울하게 죽는 이 있다면
삼년 동안 가물 것이며
장부의 머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리
지금 나의 시름 또한 그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무심할 수 있으리.
4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간간삼아간 부이사바하”
“그 주문 때문에 왕거인 나리가 붙잡혀 가서 죽을 뻔했다면서?”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니 왕도 겁이 나서 왕거인 나으리를 풀어 돌려보냈다더군.”
“온 서라벌 백성의 민심을 드러낸 노래가 어찌 어느 한 선비가 사주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번의 투서와 괘서는 밀교의 다라니로써 표현되었으니, 더욱 큰 힘이 있는 것 같군.”
“그게 부처님의 뜻인지도 모르지. 뭔가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신력(神力)이 있는 듯하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간간삼아간 부이사바하”
이 참언(讖言)이 서라벌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던 즈음, 북원(원주)의 양길(梁吉)과 궁예(弓裔), 완산주(전주)의 견훤(甄萱) 등이 궐기하여 나무망국(南無亡國)의 기운이 엿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