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필요로 하는 데는 몸 아끼는 바 없이 찾아간다-지금까지 견지해오고 있는 삶의 태도이지만, 그가 펼쳐 온 행장을 살펴보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몸 아낄 수 없는 일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온 세월이라 할 만한 것이 된다. 동국대 1학년 때부터 전국 순회 포교를 다녔는가 하면, 96년 이 곳 불암사로 오기 전까지 14년 동안 맡았던 흥국사 주지 소임 초기에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전화 상담을 시작하기도 했었다. 낮에는 흥국사 주지로, 밤에는 자동응답 전화기에 녹음된 사연을 듣고 상담을해 주는 포교 현업에 매달렸던 것이다. 83년부터 시작된 그 일은90년에 “자비의 전화”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조직체로 꾸려졌으니 , 불교 방송의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도 그의 조력을 받아 시작된 것이다
그의 맏상좌인 일관스님이 주지로 있는 상계동의 보현사도 포교에 대한 그의 남다른 원력의 결실로 볼 만한 것이다. 서울시내에 대중을 위한 불교 포교당이 거의 없던 시절, 경험도 자료도 전문 인력의 도움도 없이, 그저 “다시 생각해 봐도 포교는 부처의 법이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달린 중요한 일이며, 암만 열심히 해도 모자람과 아쉬움이 남는 불사”라는 생각 하나로 매달려 일구어 낸 곳이다. 지난97년, 지하 2층 지상 3층의 신축 건물을 마련하고 입주한 보현사는 “불교의 생활화 운동”이 실속 있고도 모범적으로 펼쳐지는 곳으로서 서울 외곽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도심 포교당으로 성장했다.
일이란 그에게 “싫은 것”이 아니라, “많을수록 힘이 나게 해 주는 것”이더라 했다. 총무원에서 소임을 볼 때도 다른 부서에서 맡기 꺼려는 일감을 스스로 떠안아 제 일로 삼곤 했었다. 서울올림픽 때, 기획 때와는 달리 공식 행사가 아닌 자체 행사로 그치기는 했으나, 수천 개의 등이 강을 화려히 수 놓아 나라 안팎의 구경꾼들을 황홀하게 했던 한강 유등제 행사도 당시 총무원 사회부장으로 일하던 그가 고안했던 것이다.
그가 5년 넘게 이사장 소임을 보고 있는 광동학원만 해도 그렇다. 해방 직후 운허 큰스님이 설립했던 광동중학교를 모체로, 광동중, 광동종합고, 광동여고 등 학생 수효 사천이 넘는 학교법인체로 자란 곳이다. 그러나 현재 동국학원 다음으로 규모가 큰 외형과는 달리, 불교 정신의 계승과 수호라는 건학 이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던 곳이다. 그러던 곳이 운허스님의 법제자인 그가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외형 가꾸기와 내실을 기하는 일도 소홀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불교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배움터로서의 면모로 일신시키는 데 크게 애썼다. 그 결과로, 지역 발전과 불교 정신을 수호하는 교육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해도 좋을 만f하게 되었다.
일면스님, 살아온 것이 오십 년 남짓 되니, 살아갈 날은 그 절반으로 볼 만한 것이 된다. 공직에 몸 담은 수행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사심 없는 마음”이 될 터인데, 지금까지도 그리 살아 왔거니와, ”갈 때에 크게 한 번 웃고 갈 수 있도록” 제대로 살아 보려 한다. 사라호 태풍이 불던 해, 제가 열세 살 되던 해에 경주 탑동 자신의 집에 들른 탁발승을 뒤따라 산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는 공부하라. 난 너희를 장엄하는 후불탱화나 되련다.
이생에서는 대중을 외호하는 사판의 일을 보고 있지만, 내생에서는 그 공덕으로 공부 한길로만 나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기 일쑤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내남없이 함께 불국토를 일구어 나가기 힘쓰되, 뒷자리, 밑자리에서 그 몫을 하려한다. 내생에서도 그 뜻은 여일할 것이라 했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다시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한 뒤로 새롭게 발심이 간절해져서 해인사로 내려와 한 철 공양주를 자청해 살았다.
그 일은 그가 그리고 싶은 후불탱화의 밑칠로 볼 만한 것이 아닐는지. 눈썹부터 새파랗게 밀고 기도처와 공양간만 오간 나날이었다. 다른 스님들의 흙 묻은 신발 몰래 닦아 댓돌 위에 가지런히 늘어 놓아드리곤 했던 것은 신발 임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출발지이자 마지막 귀의처가 될 제 마음밭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애를 쓸수록 더 잘 타 버리곤 했던 밥짓기는 제 마음을 또 얼마나 태웠던가. 탄 밥을 허물하던 교무 스님은 나중에야 서른두 살 먹은 공양주가 강원의 선배임을 알고 공양간을 멀리 에둘러 다녀 그를 민망하게 하곤 했다.
그리 살던 그를 어찌 보았던지, 채공, 간상 등 휘하에서 일을 돕던 행자들이 어느날 그를 놀라게 했다. 일곱 가운데 다섯 행자가 그의 상좌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산중에 큰스님이 여럿 계시니 당치 않다고 모두 물리쳤는데, 행자 하나는 그 뜻을 아주 거두게 하지는 못했다. 네 뜻이 정히 그러하면 서로 탁마해 줄 도반으로 여기며 한 세대 함께 살아 보자꾸나. 그리고 일관이라 이름지어 주니, 제 법명 중의 날 ‘일’자와, 성철스님에게서 탄 화두인 뚫을 ‘관’자를 붙인 것 이었다. 사제간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을 법하게도 되었다. 첫 상좌를 두게 된 소이와 그 때의 제 마음에 그러했다.
그에게 사형이 되는 태정 전 주지 스님은 육이오전쟁 때 거의 전소되다시피 한 이곳 불암사를 스무 해가 넘는 동안에 오늘에 이르는 도량으로 가꾸어 놓으셨다. 초입과 도량의 뒷 배경이 되는 불암산 자락에는 낙락장송과 활엽수렴이 우거져 있어 그 기개가 늦겨울 소조한 풍경을 녹여 놓고도 남는다. 그러나 도량을 더욱 따뜻하고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이 곳을 의지처 삼아 불심을 단련하는 불자들의 발길일 터였다.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의 개산조인 지증국사가 창건한 천 년 고찰인 이 곳은 남양주시, 상계동, 중계동 등 인근 주민 사천오백 세대가 찾는 곳이다.
수려한 풍치로 하늘이 내린 보물이란 뜻의 천보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불암사에 어느 날부터 넥타이를 맨 남자들의 발길이 찾아지기로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실직자들의 쉼터인 ‘자비의 쉼터’를 열어 운영중이다. 그들은 30평 남짓한 그 곳에서 참선을 배우기도 하고 취업 정보를 제공받기도 한다.
정초 신중기도일이라 북적대던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진 시각, 범종 소리 크게 울려 퍼진 뒤로 더 한층 짧아진 하루의 끝자락, 느티나무 섬세한 가지들이 저녁 하늘을, 그 나무 아래서 그 하늘 치어다 보는 마음까지 차분히 빗질해놓는다. 맨 위 석탑, 그 아래 양각된 마애삼존불 노천 기도전과 입구의 일주문은 가파른 돌계단 따위로 나뉘거나 이어진다. 신통전, 칠성각, 범종루 따위 당우로 둘러쳐진 대웅전 앞 반듯한 도량에 저녁 새 소리도 내려 앉는다.
따그르르르…
쯔쯔 아아아…
제 맘에 요런 단정한 도량하나 거두어 둔다면 부처도 저 무심한 새 소리처럼 저절로 내려앉아 모시어지고도 남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