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의 초반부의 심진여心眞如를 설명하면서 의언진여依言眞如에 여실공如実空과 여실불공如実不空의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간단히 이야기 해 보자면 진여라는 것을 언어를 통해 설명하자니 공이라 하기도 하고 불공이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서로 대립되는 두 특색을 동시에 말하고 있기에 선뜻 이해하기 곤란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런 곤란함을 도와주는 적절한 용어가 이미 불교에 있으니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 이다.
여담으로 요즈음 바른 한글 글쓰기를 주장하며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라든지 ‘있지 않다, 없지 않다’ 등의 표현은 그냥 ‘~이다’ ‘없다’ ‘있다’라고 표현하고 글 쓰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신다. 따지고 보면 이 진공묘유라는 표현도 이런 주장에는 뚜렷이 역행하는 표현법일지 모른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담백한 논리와는 아예 거리가 먼 표현법인 듯 보이기도 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너무도 유명한 반야심경의 구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세계를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자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것으로부터 더 들어가면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안다. 더 나아가 현대에는 이것을 더 쪼개고 쪼개어 미립자니 양자니 하는 것들에까지 이르러 관념적으로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관념적으로나마 이해 가능한 원자까지만 한번 들어 가보자.
아무리 물러터진 스펀지건, 단단한 다이아몬드건 그 물질의 최소단위는 원자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런데 이 원자라는 것은 그 크기 면에서 그리고 그 구성면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측면을 가진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대상에 비유를 해 보자면 원자의 크기는 이러하다. 만일 야구공에 있는 원자를 비교해보자면 마치 지구상의 유리구슬의 크기에 비교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작은 물질의 기본구조인 원자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의 크기는 어떠할까? 한번씩 TV를 통해 중계되는 야구로 보았던 도쿄의 돔야구경기장을 비교하자면, 전자의 궤도 즉 원자의 크기를 경기장이라고 한다면 원자핵은 유리구슬과 같은 크기로 비교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원자에서 원자핵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진 99.99%라고 한다. 나머지 전자는 이른바 ‘불확정성 이론’하에 전자구름의 형태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실로 원자라는 것은 텅 비어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가 이미 99.999%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이러한 텅 빈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물질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과연 색즉시공色卽是空이지 않은가?(물론 불교의 공空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보면 큰 착각이다. 이른바 반야공으로서의 공空과 무無로서의 공空은 분명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텅 비어 있는 원자가 물질을 구성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런 본질적本質的 무無인 원자가 이 모든 세계의 물질들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반으로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며 또 무엇이 그 물질들 사이를 채웠기에 통과하지 못한 빛의 그림자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이지 않은가? 분명, 참으로 비어 있건만은 이것을 비어 있다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있다고만도 할 수 없는 진眞·공空·묘妙·유有.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작문 선생님들께서는 과연 어떠하실까. 이 담백한 어법과는 거리가 먼 표현을 어떻게 들어주실까?
치문緇門 서序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도본무언道本無言이나 인언현도因言顯道하나니”
풀이하자면 도는 본래 말이 없는 것이나 그나마 말이 있기에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기에 기신론에서도 심진여心眞如의 두 모습을 말을 빌어 여실공如実空과 여실불공如実不空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면서 기신론은 그 문단의 마지막을 이리 맺고 있다.
“역무유상가취亦無有相可取니 이이념경계以離念境界는 유증상응고唯證相應故니라”
풀어본 즉 공이니 불공이니 이야기하지만 이 또한 취할만한 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생각의 경계를 떠나 오직 증득함으로(깨달음으로) 이해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법성게法性偈의 구절을 보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어찌하겠는가? 조금은 약오르긴(?)하지만 나 또한 깨달아 알아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