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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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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어 - 정인경┃철학박사 2011년 09월 355호

“아이들은 모두 꽃을 피우는 씨앗이다” (미즈타니 오사무)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 집을 갔더니, 어머니는 성주(가명)네가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고 전해주신다. 성주와 작별인사도 없이 헤어지게 되다니 속이 상했다. 인천에는 숲이 없을텐데하는 걱정이 들었다. 성주는 마음이 아픈 아이이다. 독일에서 돌아와 어머니 집에서 5년을 살았지만, 성주는 내가 자기네 집 옆에 살았다는 것을 끝까지 모른 체 이사를 갔다.

성주와 내가 처음으로 단둘이 만난 곳은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물론 어머니 집에서 두 달 정도 지내면서, 오며가며 성주네와 인사를 했지만, 그 아이와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실질적인 첫 대면을 했다. 내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을 누르자 성주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 나 옆집에 살잖아.” 눈빛이 한결 수그러진 성주는 “4층은 없어!”를 반복했다. 4층을 F로 표시해 놓은 것이 그 아이에게는 매우 신비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동의를 얻을 때까지 계속했다. 마침내 “땡”소리와 더불어 문이 열리고 자기와 내가 같은 층에서 내리자, 아이는 극도로 불안해져서는 내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누구야?”하고 공격적으로 물었다. “성주야, 옆집에 살잖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내 딴에는 ‘너랑 나랑은 처음 본 것이 아니다’, ‘나는 네 이름까지 알 정도로 관심있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서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모르는 아줌마가 자기 이름을 불렀으니 성주는 혼란의 한가운데서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넋이 빠진 것처럼 서 있었다. 미안했다. 벌집을 쑤신 것 같은 이 아이의 마음 달래주고 싶었다. 어머니 집 문고리에 달려 있는 야쿠르트 배달 주머니를 열었더니 역시 어머니가 또 깜빡 잊고 들여 놓지 않았다. 야쿠르트를 아이에게 주면서 “나, 607호 할머니네 살아. 607호 할머니 딸이야”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우리 집 식구 중 오직 어머니만을 알아보고, 내 어머니를 만나면 “607호 할머니!”를 마치 연호를 외치듯이 부르기 시작해서 헤어질 때까지 불렀다. 성주는 내가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나를 계속보고 있었다. 아이가 안쓰러웠다.

내가 성주를 도시에서만, 시멘트 숲에서만 만났다면 그 아이의 비밀을 몰랐을 것이다. 성주와 내가 살았던 아파트 뒤로는 제법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숲속 산책로가 제법 길게 뻗어 있었다. 나는 주로 사람들이 드문 시간에 느릿느릿 산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주’라는 아이를 진짜로 만났다. 성주는 산책로에서 한참 벗어나 비탈진 곳에서 머리를 박은 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가워서 “성주야!”하고 이름을 부르려다 멈췄다. 사람마다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순간이나 그 무엇이 있는데, 그 때 그 아이를 본 순간이 그랬다. 내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었던 무언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성주는 어린 싹들이 빛과 함께 부풀어 올라 윤기를 발하는 곳에서 하얀 새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의 노란 별들이 내려앉은 듯 한 꽃 등성이에서 아이의 팔은 노란 나비처럼 날고 있었다. 아이에게서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평상시 성주의 눈은 몽롱하게 초점을 잃곤 했는데, 춤을 추는 아이의 눈은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영롱했다. 이 세상에 저렇게 예쁜 아이가 있을까 싶었다. 아이는 내가 속한 곳의 아이 같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본 아이는 별 속에 숨어사는 요정들처럼 숲 속에서 빛나는 요정이었다.

나는 숲 속의 그 아이를 새롭게, 흥겹게, 전에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을 보듯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이의 손이 푸른 잎사귀에서 분주히 움직이더니 입으로 가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입 주위는 벌써 파랗다 못해 꺼멨다. “성주야!” 아이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맨 처음에는 시선을 둘 곳을 몰라 헤매더니 이내 몽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성주 쪽으로 다가간 나는 이 아이에게는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겁을 주기로 작정을 했다.
“너, 이런 거 먹으면 죽어!”
“아냐!”
성주는 단호했다. 나도 먹으라고 초록 이파리를 흙투성이 손에 바쳐서 내밀었다. 나를 보기만하면 내빼던 아이가 비로소 나를 바라보았다. 더구나 순진한 눈망울로 그윽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혼의 중심에는 선의善意만이 있는 것 같았다. 소리굽쇠를 울렸을 때, 진동이 사라질 때까지 들어야하듯이, 이 아이의 혼이 울렸을 때는 선의의 울림에 몸을 맡겨야 했다. 나는 아이의 손에서 초록 이파리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성주는 혀의 감각도 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썼다. 하지만 세상에서 드문 먹을거리를 준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야! 맛있다”라고 했다. 아이는 내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손에 쥔 푸른 이파리들을 입 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먹는 폼이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아이의 부모에게 말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아니 어쩜 성주의 부모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시꺼먼 성주의 입가를 모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내 나는 내 어린 시절 뒷집 ‘옥자 언니’처럼 어린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는 어른 친구가 되기로 했다. 어린아이도 부모가 모르는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부모에게 돌아간 뒤에도 아이를 대신에 그 곳과 그 때를 지킬 동화 속 용과 같은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함께 지켜야할 비밀에서 성주와 나는 결속되었다.

그 날 이후로 산책길에서 나는 성주를 찾았다. 만날 때보다 못 만날 때가 많았다. 성주를 보게 되면 언제나 내가 먼저 “성주야!”하고 반갑게 불렀고, 아이는 숲에서 만큼은 나를 의아해 하지 않았다. 내게 와서 그 날 딴 이파리며 꽃들을 “먹어!”하면서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 때마다 어린 친구의 호의를 깨지 않는 수준에서 씹어 삼켰다. 아이는 갖가지 잎과 꽃이 이 제 맛을 내고 있는지를 검사하듯이 아주 조금씩 먹었다. 이 세상에 꽃을 눈으로 보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듯이, 꽃을 향기로 맡아 황홀해하는 사람이 있듯이, 꽃을 입으로 먹어 꽃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아이는 그의 ‘일’을 가지고서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봄이 깊어져 여름이 될수록 성주는 길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흙과 뿌리와 돌멩이들 사이를 한 마리의 벌레처럼 더듬거리면서 숲의 어린 생명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주’라는 아이보다 그 숲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성주는 숲속에서 요정처럼 빛났다.

성주와 함께 비밀을 간직해 가면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어렸을 때, 옥자 언니에게 맡겼던 많은 소망 중에 하나가 떠올랐다.
“언니는 요정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요정이 없다고 생각해?”
서른을 바라보는 옥자 언니는 일곱 살 꼬마 여자아이에게 대답해 주었다.
“요정은 아무나 알아 볼 수 없어. 요정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어.”
“그럼, 요정이 있다는 거네. 나도 요정이 있다고 믿어. 난 요정을 알아 볼 거야.”

어느 날 나를 보고 달려온 성주를 보았을 때, “성주야, 넌 한 조각의 구름이 물고기처럼 흐르고, 초록빛 달이 무지개 끝에 걸려있는 마을의 꼬마요정이었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꼬마요정 성주는 듣는 둥 마는 둥 이상한 열매 두 알을 “먹어!”하며 내밀었다.

옥자 언니가 지키고 있었던 내 어린 날의 소원들 중 하나가 그렇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