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요섭현귀성葉縣歸省 선사에게 분양선소汾陽善昭 선사가 절을 하자, 이에 물었습니다.
“그대는 조금 전에 어떤 도리를 알아차렸길래 나에게 절을 올렸는가?”
“그것은 제가 바로 본분의 목숨을 던진 경계였습니다.”
뒷날 이 말을 전해들은 경산지우徑山智愚 선사는 법상에서 주장자를 세우고 말했습니다.
“봉황은 봉황을 낳고 사자는 사자를 낳는구나.”
귀성 스님은 수산성념首山省念의 제자입니다. 땅 위에 죽비를 세워놓은 것을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소 스님 역시 수산성념의 법손입니다. 두 선사 모두 임제의 가풍을 널리 선양한 대종장들
입니다. 지우 선사는 두 선사보다는 약간 후대의 인물입니다만 임제종 양기파에 속합니다. 3인 모두가
임제선풍을 드날린 대선지식이기에 종문의 사자獅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사자는 모든 짐승 가운데 으뜸입니다. 어디를 가서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누
구라도 이길 수 있는 까닭에 겁을 내는 구석이 조금도 없는 대용맹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문에서는 정통선지禪旨를 계승하여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눈 밝은 납자를 곧잘 사자에 비유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기禪機를 펼치는 본분납자의 삶과 닮은 까닭입니다.
총림은 선불장選佛場입니다. 부처를 뽑는 집은 사자새끼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백장 선사는 청규를 통해 늘 대중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회오리바람이 한없이 돌며 휘몰아쳐도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는 법이다. 다만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따라가야 하는 줄 알고서 함께 출가한 본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하느니라. 사자의 동굴에 들어가면 모두 사자가 되고 전단나무 숲 속에서는 모두가 전단나무가 되는 법이니라. 너희들도 이처럼 하기를 바란다.”
사자는 서릿발 같은 자세로 머무는 곳을 청정하게 만들어줍니다. 또 잠자는 놈을 깨워주고 게으른 놈은 게으르지 못하도록 채찍질합니다. 더불어 모두가 와서 의지하도록 들어줍니다. 훌륭한 총림은 모두를 사자를 만들어줍니다. 사자의 동굴에 들어가면 모두 사자가 되는 이치인 까닭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눈이 열린 사람이 앉는 자리는 평상이건 맨바닥이건 심지어 그곳이 진흙밭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리는 바로 사자좌獅子座가 되는 것입니다.
사자는 자기 발톱과 이빨을 사용하여 호랑이 입에 든 먹이를 빼앗고 흑룡의 턱에서 여의주를 탈취합니다.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고양이가 잡아놓은 쥐새끼 한 마리를 빼앗아 올 때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운거홍각雲居弘覺 선사는 말했습니다.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고 토기를 잡을 때도 또한 전력을 다한다.”
그러자 어떤 납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상대를 얕보지 않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큰 번뇌이건 작은 번뇌이건 거친 번뇌이건 미세 번뇌이건 어떠한 번뇌라도 사자가 코끼
리를 잡을 때처럼 그리고 토끼를 잡을 때처럼 전력을 다해 제거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지혜가 필요합니
다. 사자교인獅子咬人이요 한로축괴韓獹逐塊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개는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쫓아가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맹도 늘 안목이 수반되어야 제 몫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자야말로 종횡 무진으로 그 어느 곳 어느 때라고 할지라도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모습으로, 마음대로 거둬들이고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세상은 물론 천상세계 저편까지도높이 솟구치면서 또 동시에 천 길의 절벽처럼 우뚝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자후’에 대하여《증도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자후무외설獅子吼無畏說이여
백수문지개뇌열百獸聞之皆腦裂이로다
사자의 포효처럼 두려운 상대가 없는 말씀이여!
모든 짐승이 듣고서 하나같이 뇌가 갈가리 찢어지노라.
영가현각 선사의 이 법문을 듣는 순간 이것은 벌써 뇌가 갈가리 찢겨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일까 저것일까 하고 주저주저하면서 머뭇거리고 분별한다면 그 순간 이후로는 여우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갖가지 삿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자의 몸에서 생긴 벌레가 사자 살을 파먹듯이 내 마음 속에 작은 망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일으키는 순간 그 망상은 점점 커져 결국 나를 잡아먹고 말 것입니다. 납자가 법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들을 수 있다면 헛소리도 사자후가 될 것이요, 납자가 탐욕에 물든 견해를 지니고 삿되게 법을 듣는다면 설사 사자후라고 할지라도 여우 울음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내 안목이 없으면 남의 소리에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차막작 타고인잔
갱수반且莫嚼 他古人殘羹餿飯하라”고 했습니다. 이미 고인들이 먹다가 남은 국을 마시거나 이미 쉬어버린 밥을 다시 씹어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그것은 사구死句이기 때문입니다.
덕산德山 선사는 누구라도 문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고, 임제 선사는 학
인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내질렀습니다. 암두巖頭 선사의 할喝 역시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먹이를 노리는 사자가 신중한 자세로 그 위세와 큰 힘을 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자후를 누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눈 어두운 자들에게는 이 모두가 여우 울음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포효하는 소리를 내질러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한 순간에 바른 안목이 열리도록 해주려고 해도 제대로 된 사자의 발톱과 이빨 같은 수단을 스스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할방喝棒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지식들은 보리심菩提心이 대사자후大獅子吼요, 대비심大悲心이 대사자후大獅子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신묘년 하안거 한 철 동안 정진한 힘은 해제 이후 경계를 만났을 때, 과연 사자후가 나오는지 여우 목소리가 나오는지 만행길 위에서 스스로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자아獅子兒는 등공반척騰空返擲하고
준요자俊鷂子는 불연구과不戀舊窠로다
사자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몸을 되돌려 던지고
날쌘 매는 해묵은 보금자리를 그리워하지 않는구나.
불기 2555(2011)년 신묘년 하안거 해제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