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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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영담
1988년 02월 72호
흔히들 불교를 자랑스러운 민족 종교라고 불교인들은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불교는 정말 유구한 우리 민족사와 운명을 함께 하여 온 대단히 자랑스러운 민족 종교이다. 하지만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엄청난 시련기를 겪고 있는 격동 속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민족 종교가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는 불교의 현실이 걱정스러워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변함없는 진리이며 귀한 보배이다. 그러나 아무리 값진 보물도 흙 속에 묻혀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귀한 보배일지라도 그것이 뭇 중생들에게 전하여지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불교가 민족과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그래서 흙 속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되어 버린 것, 이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부정할 수 없는 현주소이니 그것은 전적으로 포교를 잘 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오늘날까지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하여 그의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후대의 많은 선지식들의 정열에 찬 전법과 포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포교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어린아이나 학생들이 절에 찾아오는 것을 성가신 일로만 여기며 절은 그저 나이 먹은 노인이나 옴직한 조용한 곳으로 남기를 바라는 안일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마침내 외부 종교로부터 심한 수난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과 15년 안팎의 세월에 이루어진 사태이다. 이에 비로소 위기 의식을 느끼며 불교는 이제 겨우 포교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물론 아직도 우물안 개구리식으로 전근대적 사고 방식 속에 안주하고 있는 사찰이 더러 있지만, 그래도 어린이, 학생, 청년들을 위해서 법회를 마련하는 사찰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음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본인이 포교 일선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도 꽤 오랜 세월이 지났다. 여기서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은 포교에서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앞으로 새롭게 전개되어야 할 포교의 방향은 어떠해야 할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포교를 하는 데에서 첫째로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은 통일된 불교 의식의 결여이다. 각 사찰마다 또는 각 법사 스님마다 행하는 의식이 각양각색이다. 그러다보니 이사 때문에 다른 절을 찾게 되는 신도들은 얼마 동안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다. 의식은 엄숙하고 장엄하게 어느 사찰에서나 똑같이 시행되어야 한다. 의식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식을 통해서 굳은 신심이 생겨나고 그 신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무유정법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인데 의식에 얽매여서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고 어떤 이는 꾸짖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 소식을 하신 도인분상에 해당되는 이야기지 결코 범부 중생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이계위사(以戒爲師 ;계로써 스승을 삼다)”를 말씀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불교신문을 통해, 통일된 법요집이며, 통일된 의식을 기다리는 포교사(승-속을 막론하고)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모처에서 통일법요집을 출간하여 그것도 무료로 배부한다는 소식이었다. 포교사라면 예외없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을 것이다. 정말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 법요집을 펴보았다. 막상 펴보니 법요집에 질못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기쁨은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틀린 부분은 다른 법요집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종단의 훌륭하신 큰스님들과 저명한 교수, 법사, 포교사 등 많은 분들이 모여서 집필하고 편찬한 작품이다보니 실망은 더욱 더 큰 것이며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을 벌어 그 가운데 법회식순에 대한 잘못만 한번 짚어 보겠다.
그 통일 법요집을 보면 우선 ‘삼귀의’라 하였다가 또 ‘삼귀의례’라고도 하는 식으로 어휘가 들쭉날쭉한다. 이것은 아마도 ‘삼귀의’와 ‘국민의례’를 같은 의미로 혼동한 데서 발생한 오류가 아닐까 싶다. ‘삼귀의’의 한자는 ‘三歸依’이다. 그런데 국민의례(國民儀體)를 염두에 두어 三歸依禮가 아니고 三歸儀禮로 쓴다면 四弘誓願禮라 하여야 할 것이며, 敎會歌禮라 해야 옳지 않을까? 그러므로 삼귀의(三歸依)가 옳은 것이다. 또 입정과 청법가가 뒤바뀌어 있다. 어느 곳에는 입정이 먼저, 어느 곳에는 청법가가 먼저로 되어 있는 곳이 많다. 우리가 설법을 들을 때에 입정을 하는 것은 헐떡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잡된 망상을 없애 버려 편안한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법을 듣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청법가가 앞이고 입정이 뒤여야 한다.
그 외에도 우리말 염불에서 곡이 맞지 않아 목탁을 맞출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도 완전한 번역에 의한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법요집의 마련이 지금도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민족사관에 입각한 불교 교육의 결여를 들 수 있다. 요즘 비행 청소년이 부쩍 늘고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들에게만 책임을 지울 문제가 아니다. 안방에서 보는 TV 프로그램은 상당한 부분이 청소년들을 자극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 나가면 보이는 것은 유흥업소의 간판뿐이기에 특별히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이 그런 곳을 자주 드나들며 비행의 장소로 활용하게 된다. 이렇듯 서구의 퇴폐 문명이 무방비 상태로 난립하고 있는 현대 도시의 모습은 결국 민족의식이 아직 확고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극심한 정서 불안으로 몰고 갈 뿐더러 비행 심리를 유발시키는 동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사원은 민족 문화의 소양을 배우고 익히는 문화 공간으로서 청소년들에게 개방되어야 할 것이며, 그를 토대로 하여 불교 교육이 접맥되어야 한다.
요즘 각 단체마다 행하는 연수회에서 서양식 춤을 추고 뜻도 모르는 미국 팝송이나 부르는 한심한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곤 한다. 그것이 관심을 집중시키고 유대감을 조성하려는 뜻에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분위기 살리려다 민족을 잃어 버리지나 않을지 매우 걱정된다. 젊은 학생들은 TV에서 회심곡이나 민요나 판소리가 나오면 “후졌다”라고 일축해 버리면서 서양 가수들이 나와 악을 쓰면서 부르는 노래에는 넋을 잃고 그속에 빠져 버린다.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불교 교육은 민족의식과 불교사상의 통일 위에서 젊은 청소년들이 서양문화에 찌들지 않도록 지도해야 하며, 찬불가 같은 경우도
민족적 정서에 맞게 우리 가락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세째로, 포교의 적극성 부족을 지적해야겠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미치광이 가독교인이 절에 찾아와서 대뜸 “예수 믿고 천당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 뻔뻔스럽고 황당한 소리에 하도 기가 막혀 당신이나 믿고 열심히 왔다갔다 하라, 전도할 사람이 달리 없으면 이불쓰고 잠이나 잘 일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야단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선악지개오사(善惡之皆吾師)’ 라는 말씀이 있다. 선도 악도 다 나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선을 보며 착한 것을 배우고 악을 보면 악을 행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기에 다 스승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광신적 기독교인을 보내고서 후회했던 것은 그의 적극성을 못 배웠기 때문이다. 앉을 자리, 설 자리 하나 구분 못한 푼수이지만 그 적극적 태도는 분명 우리 비구승에게 좋은 교훈이다.
이제는 자기 수행에만 연연해할 것이 아니라 포교 그 자체를 자기 수행이라 생각하고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포교에서 찾아가는 적극적 포교의 자세로 바꿀 필요가 있다. 아집과 아만의 생각 속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불교의 발전을 위하는 길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포교가 민족적, 대중적 정서에 파고들지 못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일찌기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맨 먼저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보급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때의 우리나라 상황은 한자가 공식적인 글로서 한글보다 많이 사용되었기에 한문을 모르는 더 많은 백성들은 사회 전반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기독교는 그 점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그토록 빠르게 대중 속에 깊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이땅에 뿌리내린 지 이미 1,500년이 된 불교는 한글로 된 경전이나 찬불가가 전혀 없던 실정이었다. 그런 과거의 과실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가장 절실한 대중적 요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찾아 대중이 요구하고 지향하는 바에 근거하여 포교의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의 포교는 어떤 방향에서 전개되어야 하는가. 첫째로, 양보다 질을 높이는 방향에서 포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 사회는 대량생산을 특정으로 하는 상품사회이다. 시장에 나가보면 날마다 수없이 많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두말 할 것 없이 질 좋은 상품이다.
우리나라는 종교 박물관처럼 수많은 종교들이 범람하고 있다. 각 종교마다 현란한 교리 체계와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대중들을 유혹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의 포교방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높은 수준이 요구되는 것이다. 수준 높은 포교사가 많이 배출됨으로써 수준 높은 포교를 이루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 근로자 포교에 신경을 써야 하겠다. 그것은 근로자는 생산의 직접 담당자로서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동안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자신들의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저임금과 장시간의 근로 속에 허덕이며 사회로부터 소외당해 왔다. 근로자 포교를 소홀히 하게 되면 불교는 나약해지고 부처님께 최루탄 공양을 또 올려야 할 것이다. 사회의 주역인 근로자에게 튼튼히 뿌리내린 불교, 소외된 계층의 편에 서서 고락을 함께 하는 불교가 될 때, 진정으로 불교는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전개되야 할 포교의 방향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중심에 두고 포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장기적 전망과 깊은 관련을 지닌 문제이다. 이천오백년 불법이 우리 민족에 깊이 뿌리내려 불국정토를 구현하는 데에서 미래의 주역들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 법회를 보고 있는 많은 어린이, 청소년들 속에 내일의 우리 불교가 자라고 있는 것이며 내일의 포교사가 전법의 싹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그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때 불교의 앞날은 밝을 것이며 정토의 새아침이 곧 다가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