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이것은 이것이다

이전 게시물
續 선과 그림이야기 - 김현정 2011년 07월 353호

어느 날 양개선사는 남양南陽 혜충慧忠의 무정설법無情說法에 대해 운암 스님께 물었다.
“무정無情의 설법은 누가 듣습니까?”
“무정이 듣는다.”
참으로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답변이다. 무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릇 생명이 없는 것이나 말을 하지 못하는 대상을 일컫는 것이다. 생명 없는 사물이 하는 설법이 과연 있을까를 물은 제자나, 그것을 또 같은 부류들이 듣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스승 모두 난감하기는 매일반이다. 나 같은 보통사람이 대강 어림짐작으로 더듬어보면 대강 이렇지 않겠는가 싶다.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본디 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 본성을 꿰뚫음에 있는 것인데, 본질과 본성으로 보자면 공히 유정이든 무정이든 공히 빌 공空자로 집약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제자(동산 스님)는 이때 유정과 무정이라는 분별심을 내어서 물었으니, 운암 선사는 그 분별심을 꼬집어 대답한 것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동산 스님이 물었다.
“화상께서도 듣는 것입니까?”
“내가 듣는다면 너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동산 스님이 석연치 않아 다시 여쭙기를, “어찌하여 듣지 못합니까?” 하니 운암 스님은 불자拂子를 들어 올려 세우면서 말씀하셨다. “들리느냐?” 다시 물으니 “들리지 않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내 설법도 듣지 못하는데 무정의 설법을 어찌 듣겠느냐?”
“무정의 설법은 어느 경전의 가르침입니까?”
“《아미타경》에 이르기를 물과 새와 나무가 모두 염불하며 설법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하셨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개 스님이 스승에게 묻기를 “훗날 누군가 스승님의 초상이 어떠했는가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이는 스승의 도가 어떠한지를 돌려서 물어 본 것이다. 스승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이것이다.”
선가의 문답은 가면 갈수록 접입가경, 더욱 모를 소리들만 한다. 아무튼 양개 선사는 이 말을 듣고 길을 떠나면서 강을 건너다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크게 깨쳤다고 한다. 양개 선사는 도대체 강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것이 바로 그것이었을까.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했으니, 일상에서 물이 가진 덕과 이익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물이 보여주는 지혜는 진퇴進退의 자유로움에 있다. 나아가고 멈춤에 있어 억지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문신 중에 하나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작품으로 알려진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한쪽 절벽을 배경으로 바위에 기대어 턱을 괴고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양개스님과 같이 강을 건너다가 문득 바라본 물이 아니라 그 기운과 소리에 서로 응대하기를 작정한 모습이다. 그림의 중요한 주제가 물이지만 실제로 선비가 바라보는 맑은 물은 크게 부각하여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비의 눈빛만으로도 그 앞에 펼쳐진 맑은 물에서 품어져 나오는 시원한 기운과 지혜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을 바라보는 선비는 무정의 설법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여름 이른 더위를 그림과 함께 잠깐만 미뤄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