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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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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여익구 1988년 02월 72호
무심한 듯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삼라만상의 현상을 조금만 주의깊게 관찰하면 나름대로 일정한 법칙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현상은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나 불가지한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각각에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법칙에 의해 운동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법칙성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아직 인간의 과학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결코 밝혀질 수 없는 신비함은 아니다. 즉 미지(未知)일 뿐 불가지(不可知)는 아니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어떤 영향을 주고자 할 때 기본적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접근하여야 올바른 작용이 가해질 것이다. 즉 사물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고 합법칙적 사고를 하고, 전체와 부분의 관계, 보편과 특수의 차이, 우연과 필연의 상관성 등을 명확하게 구분하여야만이 문제 해결의 정도가 나타난다.
현대 한국불교가 당면한 문제에 관해 그간 무수히 많은 분들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마련하여 실천해왔다. 그 결과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가시적이든 그렇지않든 상당한 성과를 얻어내고도 있다. 방대할 정도로 다양하게 분화된 산업사회의 제계층에 접합시켜 나가고 있는 불교의 다양성도 과거의 안일한 태도를 일신한 성과로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운동인 민족 민주운동에서도 비록 경험이나 역량 면에서는 아직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민족종교로서의 잠재된 힘을 여실히 발휘하고 있다. 흔히들 산중불교, 사변불교, 기복불교라고 매도하던 불명예스러운 규정을 탈피하여 산업사회의 한 복판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역동성 있는 불교의 진면목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교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유효한 것은 왜인가? 엄밀히 말해서 불교에는 기본적으로 오류가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뛰어난 실천과 가르침에서 단 한 가지의 흠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2,500여년 전의 가르침을 지금 이곳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 현실에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접합시키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불자들은 각자가 소신껏 경전을 재해석하고, 실천에 적용시켰고, 현재도 지속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노력으로 나타난 성과를 일정한 분석적 유형으로 분류하여 보면 대체로 두 가지의 큰 범주로 설정할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문제 인식의 중심을 종교의 완결성 속에 두려고 하는 종교 지향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 인식의 중심을 사회의 총체성과 결부시켜 모색하려는 사회 지향적 관점이다.
문제 인식의 차이는 곧 실천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같은 포교사업에 주력한다고 할지라도 전자의 종교 지향성에 맞추는 경우 그것은 단순히 교세 확정이라는 외연성에 연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것은 교세 확장의 외연성에 치중하기보다는 종교의 질(내용)의 변화와 아울러 그것을 규정하는 사회 성격, 즉, 국가 권력이 내포하고 있는 바에 대한 변혁으로 표출되게 하는 운동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불교는 사회 지향성 종교였으므로 현대 한국불교의 문제 해결은 초기 불교의 가르침으로 재무장하여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결론을 좀더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보충설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는, 단순한 산술적 의미로서의 총합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유기적 역동성을 갖고 역사의 방향을 개척하며 진보한다. 한시도 쉬지 않고 서서히 또는 어떤 시기에는 급격하게 변화-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발전은 사회의 외형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인 사람의 의식까지도 새롭게 변화-발전시키게 된다.
역사라는 것이 어떤 시기에는 우연히 정체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동이라는 역행도 보이지만, 그것은 일순간의 특수한 현상일 뿐 전체로서는 필연성을 관철시키게 된다. 종교 역시 이 필연성에 의해 형식과 내용이 규정되어 오랜 세월 동안 변화-발전해 오고 있다.
봉건제적 사회체제에서는 일방적 권위에 의해 종교 지향적 관점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 단편적인 예로, 철저하게 신분제도에 의한 복종이 강요되던 봉건제에서의 교육 체제는 세습에 의해 보장된 상층 지배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피지배계급인 평민은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었으므로 종교 경전에 대한 해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종교는 그것이 정치의 담지자였으며 동시에 물적 토대를 장악환 권력과 대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에 대한 강제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신분을 보장 받는 자본제 사회는 교육의 기회가 제한이 없다. 물론 그것도 형식적 무제한일 뿐 실제로는 교육 받을 수 있는 경제력 보유자에 국한된 것이지만, 어쨌든 엄청난 생산력 발전으로 대중은 다양한 형태로 정보와 교육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과거와 달리 종교는 정치와 분리될 수 밖에 없고, 그 물적 토대 역시 취약해졌다. 권위에 의한 종교는 해체되고 경전의 독점 영역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종교 교회의 세계관은 더 이상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 과학적 세계관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의 완결성은 사회의 진보에 대해 보수적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니 자연히 대중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지향성은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에 대한 전정한 종교의 역할을 왜곡시킬 수 있다. 인간의 의식 규정은 존재성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속해 있는 사회성에 의존한다. 인간에 이기심이라는 무명에 가득차 있음은 사회가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계급사회로 구성된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타인보다 뛰어나야 생존할 수밖에 없는, 경쟁이 전제된 사회에서는 이기심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채 인간 심성을 이타심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그야말로 낭만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이 교통사고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에 대해 서울의 버스운전사나 택시기사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문제 인식이다. 좁은 도로율을 감안하지 않은 채 1년에 60만대 가량의 차량이 늘어나는 현실 여건은 생존을 위해 운전을 직업으로 삼은 기사들에게 역설같지만, 생명을 저당잡혀야만 먹고 살수 있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생활의 보장도 없이 질서 의식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위장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질서 구호의 이변에는 독점자본의 수탈 체제에 순응하라는 강제가 도사리고 있음이다.
이런 체제에서 인간 의식을 종교적 윤리로서의 이타심을 발현시키려 한다면 본질적으로 수탈자의 편에 서서 가련한 중생에게 온정을 베푸는 정도에 그친다. 또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기심에 충만한 존재라고 편향된 규정을 하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성격을 합리적으로 변화시킬 때 총체적으로 변화되며 남의 아픔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이타적 존재로 될 수 있다.
어떤 교육자는 학교 교육을 올바르게만 실행하면 학생들의 품성이 좋아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올바른 교육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가능한가? 그 사화의 총체적 성격이 어느 한편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적대적 계급사회라면 결국 그것을 정당화하게 되는 교육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 교육제도의 수정-보완은 다만 부분적 개량의 형식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본질적 개혁은 사회 구성의 변혁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학교라는 형식에는 변함이 없더라도 그 교육의 내용은 자연히 질적인 차이를 갖게 된다.
불교에서의 최고 인격체로 우리가 추구하는 보살은 ‘중생의 아픔을 내가 받는’ 이타적 인간이며, 그러한 사회는 정토세계로서 바로 우리가 목표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의 실현은 불교를 철저한 사회지향성 종교로 전환시키고자 할때 한발 성큼 당겨질 것임을 확신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사회지향성의 종교로 불교를 전화시키는 것은 양적 확대의 개념이 아니라 질적 발전의 개념이다. 많은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반성의 성과로 기존의 안일한 태도를 탈피하여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중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 결과 포교의 활성화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런 외연적인 성과와 아울러 종단이라는 행정기구의 체계 내지는 담당자의 의식변화도 상당히 고양되고 있다. 이런 사업에 어떤 의미에서 운동이라는 개념을 접합시키기도 한다. 허나 운동은 사물의 내부에 온존되고 있는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바꾸는, 질적인 변화를 갖게 하려는 실천 과정인 것이다. 포교나 종단의 개혁, 사회사업 등에 하나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키려면, 기존의 낡은 사회의 모순 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한 부정의 노력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에 봉사하는 제반의 논리적 일관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이 시기에서 운동의 과제가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이것에 봉사하기 위한 포교의 내용과 세력의 효과적 배분이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불교에 대한 개혁 역시 분리된 사업에 각자 충실한다고 획득되는 바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성을 온존시키려는 보수세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진보세력과의 상호 역(力)관계에 의해 주어진다. 잊지 못할 ‘80년 10’27 법란은 결코 당시 불교계의 개혁의지가 미약했기 때문에 당한 치욕이 아니다. 개혁의지는 충만해 있었으나, 사회 전체의 역관계에서 우월한 물리력을 장악한 군사권력이 완전한 정치권력의 확보를 목적으로 자행한 것이다.
이제까지 주로 불교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위한 시론적 방법으로 종교지향성과 사회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여 해결점도 함께 논해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와 사회라는 분리의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이 타당치 않을 수 있다. 이미 밝혔듯이 이런 유형의 구별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범주인 철학에서 두개의 대립물인 관념론과 유물론의 차이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불교를 일정한 틀 안에 국한하려는 협애한 시각을 거부하고,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이것은 바로 민중불교운동인 것이다.
민중불교운동은 기존의 불교가 벌여오던 제반 사업과 확연히 구별된다. 무엇보다 운동의 주체는 확고한 민중사상, 즉, 과학적 세계관을 갖는 진보적 사부대중이다. 출가나 재가의 한 부분이 할 수 있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애매한 논리는 배격한다. 억압자에 대한 비타협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세계사의 보편과 필연에 봉사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에 대해 가장 헌신하는 운동이며, 중생제도의 정확하고도 유일한 길이다. 한국불교의 모든 것이 민중불교운동으로 집중되게 하는 철저한 부정이 문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