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숫대야와 라면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우소 - 길상
1999년 03월 205호
해맑은 모습에 순수함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이 산 저 산을 뒤지며 먹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즐거움에 여름 한철과 가을을 몹시도 기다리며 살았다.
머루랑 다래랑 어름을 따먹고 잣이며 밤이며 호두를 주워먹는 재미는 그 시절을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그다지 홍미롭지 않겠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는 참으로 추억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해인사에서는 라면을 가끔씩 끓여 먹기 시작했고 그 라면이 먹고 싶던 나는 어떻게 해서 라면을 하나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끓여 먹을 그릇을 구하지 못하고 며칠을 가지고만 있다가 어느 날 수각에서 세수를 하다가 찌그러진 세숫대야에 시선이 머물렀고 번개가 치듯 나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저 세숫대야에다 라면을 끓여 먹으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흥분과 함께 지금은 없지만 그 무렵에는 운동장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표고버섯을 재배했고 비만 오면 돋아나는 버섯의 신비로움에 취해 자주 들르던 표고 밭에 가서 한침을 뒤져 버섯 몇 개를 따 들고는 돌아와 세숫대야를 깨끗이 씻어 장작을 때는 아궁이에서 연탄 아궁이로 개조된 곳에 물을 붓고 라·면을 삶아 천연의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드디어 라면을 먹게 되었다. 일반 사람들이야 손 씻고 발씻는 세숫대야에다가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보았겠지만 그릇을 구하지 못해 온갖 궁리를 짜내던 내게는 세숫대야에 대한 고마움뿐이고 더러움 자체가 이미 없었다. 그러고 그 맛에 대해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라면을 먹게 되면 그 때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