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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속에서 은유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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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 선과 그림이야기 - 김현정 2010년 12월 346호
문학에서 은유는 읽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마치 그림에서 드러난 여백과 같은 공간이다. 서양의 풍경화와 동양 산수화의 차이는 공간에 있다. 화면 속 빈 공간을 용납하지 않는 풍경화와는 달리 산수화에는 여백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비단 산수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요 거의 모든 동양회화 특히 선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백은 공간, 거리 등을 표현할 때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 등장한다. 원래 그림이란 것이 삼차원의 공간을 이차원의 평면에 옮게 놓은 것이다 보니 그림 속 화면에는 여백이 없어야 옳다. 하지만 실제로 그림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좀 다르다. 오히려 여백을 통해서 더 많은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허공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땅이 나를 실어주고 있는 것이고 내 몸은 하늘 속에 사는 셈이다. 그 하늘을 그림 속에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여백이다. 허공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허공 속에는 수많은 사연과 감상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여백도 바로 그런 공간이 아닐까싶다. 구름이나 안개, 텅 빈 하늘 등으로 규정지어진 여백의 공간 속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는가는 오로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상상력의 몫이다. 그래서 여백은 문학에서 사용되는 은유법과 같이 사용되는 일종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양의 걸출한 많은 작품들이 이 여백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긴 하지만, 역시 남송대 작가들의 이를 활용하는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원은 중국회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그 중에서 선禪과 관련되어 이미 앞서 살펴본 <동산도수도>와 같은 작품도 있고, 선화는 아니지만 선미禪味가 있는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에 하나인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차가운 강물에 홀로 낚싯대를 드리우다)>와 같은 그림도 있다.
이 그림은 현재 일본 동경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림을 감상해보자면 그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화면에는 물결과 낚싯배와 거기에 타고 있는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이 전부이다. 너무나 간결하고, 단순해서 그 작은 조각배는 감상자에게 오히려 강하게 와 닿는다. 물결은 한가하고, 뱃전도 느슨하며, 노인의 모습은 더욱 담담하다. 노인은 배가 떠 있는 강물에 관심 없고, 보아하니 낚싯대에 딸려 올라올 그 무엇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가 역력하다. 아마도 배를 띄운 것은 낚시를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며, 낚싯대를 내린 의도 또한 석연치 않다. 감상하는 사람들의 모든 억측들을 등에 얹고 허허로운 강물 한 가운데 배는 무심히 오가며 잔잔한 강물은 뱃전을 가늘게 쓰다듬고 있다. 바람에 쓸리는 가랑비에 도롱이와 초립草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뱃머리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을 일. 강은 무심하고, 배를 띄운 노인도 무심하고, 낚싯대 역시 무심하다.
세상살이가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무엇이든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같은 사람은 인생에 ‘혹시나’하는 기대를 걸고 시간의 반을 보낸다. 이런 엉터리같은 생각을 갖은 내가 이 그림을 보면 생각나는 구절이 <황석공소서>의 ‘숨어서 도를 품고 그 때를 기다리노라(잠거포도潛居抱道 이대기시而待其時)’하는 구절이다. 황석공께서 기다린다는 그 때는 마음에 큰 도를 품고 뭔가 방비하고 대비해서 기다린다는 것이겠으나 마음에 품을 도는 그 때를 만나야만 날개를 펼치게 되고, 그때가 이르지 않으면 그저 도를 품고 말뿐이겠다. 물론 글에서는 큰 도를 마음에 품은 자에게 몰신(沒身, 죽은 뒤) 후 뒷날을 기약하자고는 하지만 어디 그것이 온전히 내 몫일까 하는 별 시덥잖은 생각도 든다. 아무튼 마원의 <한강독조도>는 지금과 나중 사이에서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겪게 되는 그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