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강진 무위사 주지 법정 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정영 2011년 03월 349호
눈발이 날리는 무위사 너른 마당에 서서 극락보전을 본다. 조선 초기의 목조 불전이니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니 그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고, 지나는 사람 하나 없으니 벽화의 전설이 선명히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오신 법정스님이 이리 오라 손짓하신다. 스님은 차를 내어주시며 그 전설을 말씀하신다.
“극락전이 완성되었을 때, 한 노인이 와서 주지스님한테 49일 동안 불사를 할 것이니 문을 열어보지 말라며 법당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주지 스님이 하도 궁금해서 마지막 날 엿보았더니 노인은 간 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지요. 스님이 놀라서 문을 열었더니 그 순간 파랑새가 날아가 버려서 벽화 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답니다.”
스님이 무위사에 머문 지도 5년. 그간 스님이야 말로 불사에 여념이 없었다. 나무도 없고 방사도 없는 절에 와서 일곱 채의 집을 지었으니 휑하던 무위사 마당이 그나마 포근해졌다.
“그간 집 짓기 바빴네요. 불사라는 게 하고 싶어도 인연이 안 되면 못 하는 것인데 인연이 닿으니 자연스레 하게 되더라고요.
스님은 간짓대 두 개만 걸쳐도 다 걸쳐질 법한 화순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출가했다. 그 시절엔 출가라는 개념보다도 그저 공부하러 간다며 나섰던 게, 도량석 소리가 좋아 자꾸만 부처님 전에 가게 되고 방에 불 때라고 하니 불 때고 밥 하라고 하니 밥 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활에 젖어들어 스님이 되었단다.
“초등학교 다닐 때, 근처 용암사라는 절로 6년 동안 봄 가을 소풍을 갔어요. 그때부터 절 주위에서 놀면 향냄새가 참 좋았어요.”
그렇게 해서 83년도에 대흥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그러고는 법주사 강원을 다니고 광주 향림사에서 6년 동안 노스님을 모셨다. 노스님을 모시면서는 대학에도 다니고 방위병으로 복무도 했다.
“야간 근무를 서고 오면 새벽 4시쯤에나 절에 돌아오는데 5시 예불에 들어가니 졸기 일쑤였죠. 그러면 노장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셨어요. 우리 노장님은 아침 저녁 예불을 한 번도 안 빠지셨어요. 그것이 당신을 버텨가는 힘이 아니었나 싶어요. 노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그걸 배우지 않았나…. 어려울 때일수록 예불에 의지하고, 그렇게 계속 해왔기 때문에 늘 잘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죠. 그게 노장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가르침이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는 노스님 곁에 있으면서 불평불만만 많았는데, 그것이 지금 와서 보면 내 동력이 아닌가 싶어요.”
이판으로 나섰기에 바쁠 때는 예불을 빠지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안 빠지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스님의 의지처다.
“예전에 어느 스님이 그러시대요. 옛날에 시골에서는 절에 올 때 거의 쌀을 가지고 오잖아요. 그러면 부처님께 갖고 갈 거니까 그 전날부터 집에서 상을 갖다 놓고 하나하나 뉘를 골라요. 그렇게 해서 절에 갖고 오잖아요. 그 스님 말씀이, 그 불자는 뉘 고를 때 이미 부처님께 공이 다 갔다 하시대요.”
노스님을 모시고 나와 스님은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사 공부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판으로 살아야 할지 사판으로 살아야 할지 정립이 안 된 상태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선방에도 갔으나 헐떡거리는 마음이 더 많았다. 그 후로 스님은 대흥사에서 교무 소임을 보면서 활동적으로 살아야겠다 싶었다. 그러는 중, 스님은 목포 유달산에 있는 달성사 주지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 달성사에 살면서는 불교대학을 운영했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할 데가 없었다. 대부분이 기독교에서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때부터 유치원이나 복지관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위탁시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실적 위주로 위탁을 맡기니 실적이 없는 우리는 어쩌겠어요. 불교대학 안에 봉사단을 만들어서 작은 봉사 활동을 다니면서 실적화 했지요. 그렇게 해서 2003년도에 신안군 노인전문 요양원 위탁을 맡게 됐어요. 조계종에선 노인전문요양원 위탁 받은 게 처음이었어요. 그 시절만 해도 도시에선 복지에 관심이 있었지만 시골엔 관심 있는 스님이 별로 없었거든요.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해서 대학원 다니면서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지요.”
섬에선 절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실. 그래서 스님이 가도 냉대하기 일쑤란다. 그저 스님의 옷을 보여주는 것만도 불교를 알린 것이라고 스님은 생각한다. 그러던 중 스님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고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복지라는 건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 지역사람과 함께 굴러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단 법인 ‘풍경 소리’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처음엔 사비를 들여 그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 반찬을 가져다주고 빈통을 수거해 오는 일이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스님도 동참해서 손수 도시락을 들고 나선다. 그렇게 1년을 하니 정부에서 보조금이 나와서 지금도 계속해서 도시락 배달을 하고 있다.
“내가 전문적으로 나서지는 못 하지만, 복지 쪽에 뜻은 있지요. 스님의 본분사가 수행이고 포교인데, 복지도 하화중생이고 포교잖아요. 우리 요양원에 할머니들이 85명이 있어요. 절반 이상은 사람을 못 알아보시는 분들이죠. 그런 분들 보살피는 게 우리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그런 노인들을 보며 자화상을 가만히 그려본단다. 그러면서 불교의 노후복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이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했을 때, 개인 사찰을 가지려는 생각이 없어지고 그럼으로써 불교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다.
무위사에 온 해에 스님은 어린이 법회도 만들었다. 포교사들이 워낙 열심히 하다 보니 3년이 지나자 아이들이 30명이 되었다. 근처 교회의 아이들이 줄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해왔는데 포교사들이 하나 둘 이사를 가다보니 정작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잠시 어린이 법회를 쉬게 되어 스님은 아쉬운 즈음이다.
그리고 강진에서는 강진 사찰의 스님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고 운영한다. 타 종단과 함께 북한에 연탄을 보내기도 했고 연합 방생을 가기도 한다. 그리고 강진에 있는 사찰의 스님과 신도들이 모두 실내체육관에 모여 함께 어우러지는 가을 체육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함께 노래자랑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신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요.”
그러면 스님은 힘들다며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어떤 말씀들을 해주시는지 여쭙는다.
“팔다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째고 치료하면 되지만 마음이 아픈 사람들한테는 그에 맞는 약이 없어요. 그저 들어주는 게 위안이지 않겠어요?”
스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스님 말씀에는 색도 없고 향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란 말씀, 흘러 흘러 오다보니 여기라는 말씀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어요. 옛날 스님들이 흔적도 남기지 말고 가라고 했잖아요.”
나도 모르게 내세우고 싶은 게 있고 나도 모르게 탐내는 것도 있는 삶이니,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 것인가. 그러니 스님이 색도 칠하지 않고 향도 얹지 않은 ‘있는 듯 없는 듯’이란 말엔 그 속뜻이 다 담겨 있었다. 스님이 붓글씨에 능하시다 하여 여쭈니 스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어요. 스님이 어떤 것에 관심 있어서 뭐할 것인가? 붓글씨는 그저 소일거리죠. 무료한 시간도 있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도 있는데, 그런 시간을 편하게 해주는 게 붓글씨대요. 하루에 두어 시간 글씨를 쓰다보면, 그 시간은 간 지도 모르게 가버리잖아요.”
이 말씀에도 굴곡이나 삐침이 없다. 그저 무색무취의 물이 흐르듯 말씀하시니 또 다시 ‘있는 듯 없는 듯’이란 말을 떠올릴 뿐이다.
“칠불통계七佛通戒를 많이 생각해요.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선은 힘써 행하며 제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려운 이야기도 많지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스님의 산책을 따라 나선다. 산길로 접어드니 언 땅에 새하얀 눈이 덮여 발길이 조심스럽다. 그러나 눈밭의 동백 이파리는 더 반지레해 보이고 댓잎은 더 푸르러 보인다. 그러니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더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니 행동 또한 조심스러워지고 마음도 평온해진다. 얼음길을 불평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님을 뒤따르며 또 깨닫는다. 앞서 가는 스님께 스님으로 살아온 삼십 년 세월을 여쭙는다.
“대궐 같은 집에서 세끼 다 먹으면서 여름엔 풀옷 입고 부채질하면서 다니니 부러울 게 없지요. 산은 바른 소나무보다도 못난 소나무가 지킨다고 하잖아요. 난 못난 소나무라서 집 지키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