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대사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대사는 도승경시가 부활되었을 때 많은 스님들로부터 나는 3년째 소설 ‘서산’을 집필하고 있다. 서산대사가 생존했던 조선 중기는 유생들에 의한 불교의 배타성이 가장 심하게 나타났던 때였다. 우리 역사에서 3대 유종儒宗으로 일컫는 남명, 퇴계, 율곡이 서산대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왕조실록’을 보면 퇴계는 몸이 쇠약한 분으로 요직의 벼슬자리를 두루 거치면서 몇 차례 사양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데 그것이 겸양이라기보다 공교롭게도 존재의 보전에 주변의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을 때 그리했음을 연상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은 열여섯 나이에, 훌륭한 어머니요, 어진 아내의 표상으로 이야기되는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죽음으로 인간사의 무상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패려하고 간악함이 도를 넘은 여인’으로 알려진 계모 권씨의 이간질로 인생이 참 하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1년간 선학禪學을 공부하다가 환속한다.
당시 퇴계는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시하는 편집광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정명도와 정이천이 했다는 정좌를 불가의 좌선처럼 이야기한 것을 보면 선禪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람 같았다. 그러한 그의 눈에 불교가 어떻게 비쳐졌을까. 그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들은 물론 왕양명과 진백사까지 이단으로 몰았다. 양명학을 지지한 입장에 서있는 노수신까지 선학의 병통에 깊이 물든 사람이라고 배척했다. 그러니 그에게는 척불이 당연한 것일 터이다.
한데도 퇴계를 비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율곡은 퍽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안과 밖이 다른 인간, 중노릇을 하다 도망쳐 나온 인간, 나라를 망칠 거간巨奸이라는 비난까지 쏟아진다.
이 두 사람에 비해 남명은 도교와 불교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는 성리학이 ‘제아무리 불교를 비판한다고 할지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자기 의견과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 편집광적 비난을 퍼붓는 퇴계한테 도리어 빗자루나 들고 청소나 하라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함에도 그들의 유가적 정치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공자가 펼치려 했던 대동大同의 면모를 읽어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끄러짐(slip)’은 ‘미끄러지다’의 명사형이다. 위치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사회일수록 미끄러짐의 현상이 가파르게 나타남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말에 대한 정신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다. 이 이미지는 폐쇄된 질서의 법칙에 상응하는 의미작용으로 만들어지며 종속된 조건이 없으면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또 그것은 영구적이지도 않으며 그 자체로도 의미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교의 중흥에 나섰던 보우 스님은 당시 유생이라고 하면 조선팔도 사람이 다 나서 죽이라고 하는, 그래서 요즘 일본말 ‘쓰나미’ 현상과 같은 사회적 파도에 내몰렸는데, 율곡의 ‘논요승보우소’의 한 방에 날아가, 제 입으로 선교 양종을 부활해 제 입으로 양종 선과를 혁파한, 조선조 가장 무능한 왕 명종에 의해 제주로 귀양을 가 변협이라는 무장의 손에 장살을 당한다.
이러한 시대에도 불가의 침묵은 계속되어 왔다.
서산 대사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대사는 도승경시가 부활되었을 때 많은 스님들로부터 경시에 나갈 것을 권유 받는다. 그 무렵 대사는 금강산 향로봉 아래 바위에 앉아 선을 닦는다. 그때 달팽이가 바위 위를 기어가는데 어디선가 들쥐 한 마리가 뛰어와 누가 바위 끝가지 빨리 달리는지 내기를 하자고 한다. 대사는 그때 달팽이가 들쥐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듣는다.
“얘, 나는 네가 안 보여!”
넌 나한테 없으니까 너한테도 내가 없어야 네 눈에 무엇이 제대로 보일 거라는 대답을 해준다. 생각이 이러했음에도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도승경시에 나가 도장원을 하고 몇 년 있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그 뒤 정여립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죄인의 신분으로 선조를 만난 뒤,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는 불살생의 칼을 들고 나선다.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오늘날, 자본으로 사회를 불평등 구조로 만들어 들쥐들만 들끓어 조선시대 성리학이 앉았던 이념의 자리에 올라앉은 그 이념이 무엇인가. 그 이념을 주도하는 자들이 누구이며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비쳐준 지엽적인 일단만 보더라도 꽉 막힌 핵심 권력의 귀를 트라고 촛불시위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령 무상급식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며, 점잖지 못하게 늙은 노인들이 냉전시대를 연상시키는 챙이 긴 얼룩무늬 모자를 쓰고 나와 자기들이 나라를 제일 많이 사랑한 최고의 애국자임을 만세삼창으로 드러낸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요즘 시중에 회자되는 병역면제 정권에, 투기꾼 내각, 스폰서 고위공직 사회에 칼끝을 들이밀어야 할, ‘나라를 잘 지킨 노인’들의 애국심이 엉뚱한 데서 춤을 추는 것을 보면 애국도 참 가지가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애국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애국과 어떻게 다른가. 어느 인터넷에서 그랬던가, 그들은 한 독제자의 용병으로서 애국이었다고…?
왜 우리 사회는 폐쇄된 권위적 질서에 종속되어 상응하는 힘만 있고, 대동적 공익을 외면한 꽉 막힌 귀를 뚫어줄 노인들이 없는가.
산문에 계신 선지식들이여! 들쥐와 달팽이의 경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왜 말하지 않는가.
신지견 님은 소설가이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제9회 경희문화상 소설부문을 수상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그림자 연구, 다비장 가는 길, 벗어버린 사슬, 꽃들이 하나로 핀다, 습 習(vāsanā), 눈물 한 방울, 서산사상과 신자유주의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