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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있는 우바이를 위해서 1-불교에서의 여자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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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 김인이 1988년 01월 71호
피야다시 지음 • 김 인이 옮김


흔히 ‘대승’이라구 자처하는 불교에서 오히려 그 사상에는 걸맞지 않게 “여자는 성불할 수 없다”거나 “여자는 소견이 좁다”하는 편협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 비구니의 존재가 한국보다 더 미미한 스리랑카의 한 비구스님이 쓴 이 글에서 우리는 불교와 부처님 말씀의 참 모습을 알 수 있다. 이는 결코 여자와 남자의 교유한 특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편견을 뛰어넘은, 열려진 종교로서 불교가 그 가능성의 영역을 확대해가는 작업의 한 시도로 마련된 것이다.
피야다시 스님은 지금 스리랑카의 바지라마 사원에서 정진하고 있으며, 한편 국제불교포교사로서 유럽과 남미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순방하며 불법을 널리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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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이 살던 무렵 인도 사회에서의 여자의 위치는 종이나 다름없이 비참하였다.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그 즈음에는 중국에서부터 그리이스에 이르까지의 모든 문명국가에서 여자는 낮고 천한 위치에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류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불후의 사상을 주창하였음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사상의 위대성에 필적할 만큼 사회개혁가로서 또 문화혁명가로서도 위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불교사학자들은 곧잘 잊어버린다.
석가가 그 무렵 사회구조를 변혁시킨 것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공로는 고질적인 카스트 계급제도의 폐지와 여자 해방이었다. 보기 드문 탁월한 용기로써 석가는 카스트 제도로 사람을 속박하고 여자를 노예처럼 취급하는 관습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이 두 가지 관습은 그 당시 인도인의 도덕적 활력과 원기를 약화시킨 악습이었다. 석가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맹목적이고 완고한 생각을 변혁시킴으로써 편견과 편협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인도 사회에 건강한 정신력과 윤리적 청결함을 가져온 것이다.
그 무렵 브라만은 인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여자의 지위를 종이나 재산 따위와 동일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여자는 아무런 권리도, 말할 자유도 갖지 못한 채 집안에 갇혀 살아야 했고, 남편이나 아버지나 남자 형제들을 시중드는 하녀의 역할을 할 뿐으로 그 이상의 존재로는 여겨지지 못했다.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다는 생각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고대 인도 사회를 다스린 마누법전에 따르면, 여자에게는 결혼이란 마치 종의 굴레를 씌우는 풀무질과 같은 것으로서 결혼과 더불어 여자는 남자에게 완전히 구속되어 남편의 부속물이나 또는 종이나 하녀가 되는 것이라 한다.
남편에게 고분고분하게 복종하고 남편이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부족함없이 다 이행해야만 비로소 여자는 천국의 문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남자의 경우와는 달리, 여자는 제사를 지낼 필요도,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사회적 의례를 수행할 권리도 없었으며, 극락에 가기 위해 따로 기도를 할 까닭도 없었다. 다만 남편에게 성실하게 충성하고 변함없이 복종하는 것만이 하늘의 복략을 얻을 수 있는 열쇠였던 것이다. (물론 베다를 공부할 권리도 여자에게는 없었다.)
그러한 아내로서의 의무는 비단 남편이 살아 있을 때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장례식 때에 아내는 그 뒤를 좇아 함께 죽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시체를 화장시키는 불 속에 뛰어들어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이제는 그러한 야만스러운 행위가 완전히 철폐되어 인도 문화의 명예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는 않지만, 고대 인도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이 유행은 그때의 사회에서 여자가 얼마나 비참한 운명을 지녔던 지를 말해 주는 뚜렷한 지침이 된다.
그 무렵에는 딸을 출산함은 불행으로, 아니, 더 나아가 재난으로 여겼다. 일반 대중뿐만이 아니라 지식층들도 그런 편협하고 비상식적인 견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석가가 어느 때인가 코살라국의 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때에 마침 왕비 밀리카가 딸을 낳았다는 전갈을 받자왕은 미칠듯이 절망하며 비탄에 잠기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깨달으신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오, 왕이여, 동요하지 말라.
이 아이는 앞으로 증명할 것이다.
그가 사내아이보다 더 뛰어난 자손임을.
이 아이는 현명하고 덕망있게 자라
남편의 어머니를 존경하는 충실한 아내가 될 것이며,
이 아이의 아들은 장차 선행을 하며.
위대한 왕국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신성한 아내는 참으로 나라의 길잡이임이라.

불교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최상의 도를 얻는 데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석가는 그 당시 종교 제도나 정치 및 사회 체제가 여자에게 지나친 경멸과 악의에 찬 태도를 갖고 있음을 간파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바꾸어놓았다. 여자는 어느 면에서도 남자에게 뒤지지 않으며, 특히 지혜의 예민함 근면함에서는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석가는 역설하였다. 모든 남자가 그러하듯이 모든 여자는 불멸의 숭고한 가능성을, 곧,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고 한 석가의 이 선언은, 카스트 제도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종교계에는 커다란 격변이었으며 확고한 사회 관례에 정면으로 맞선 진취적인 사고였다. 결국 인도 사회의 그 고질적인 악습이 석가의 당당하고 올바른 신조 앞에서 그 견고한 성을 허물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음은 자명한 이치였다.

석가는 여자는 남자의 어머니이며, 누구도 어머니만큼 큰 존경과 공경을 받을 사람은 없으며, 여자든 남자든 어머니에게 진 빚은 갚을 수 없게 크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여자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차츰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짐에 따라 남자들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이렇게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와 조국(어머니의 땅)은 마땅히 하늘보다 더 귀하고 높지 않은가.

석가는 또한 사람들에게 여자를 올바른 정의와 존경으로 대할 것을 힘주어 말했다. 남자들에게 누이를 보호하고 아내를 사랑과 인자함으로 보살피면서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며, 또 딸에게도 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기회를 허락할 것을 가르쳤다. 그와 함께 석가는 시갈로바다경(經)에서 재가신자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여야 할 다섯 가지 지침을 일러놓았다.

남편은 아내를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우하며. 경멸하거나 얕보지 말며, 신의로써 대하며, 더러는 아내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장신구를 비롯하여 아내가 원하는 것을 사주어야 한다.

같은 경전에서 석가는 다시 이내가 지켜야 할 의무 다섯 가지를 말씀하였다.

아내로서의 할 일을 잘 처리하며, 남편의 가족과 친구들을 잘 대접하며, 성실하며, 남편이 벌어오는 재산을 잘 관리하며, 아내의 의무를 부지런히 솜씨있게 수행해야 한다.

이에 대해 성급한 비판자는 석가가 여자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에 여자의 의무와 전형(典型)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고 결론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내세우기에 앞서 먼저 석가가 ‘어머니들의 사회’에 대한 복지를 얼마나 강조하였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곧 모든 진보와 성취는, 그것이 세간의 것이든 출세간의 것이든, 집안 일을 이끌어가고 가사에 종사하는 여자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현세와 내세를 위하여 여자의 복지에 도움이 되는 미덕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첫째가 종교적인 헌신이요, 둘째는 부끄러움을 알고 외경심을 느끼는 것이며, 세째는 악의나 적개심을 버리고 성을 내지 않는 것이며, 네째는 질투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로 인색하지 않은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여섯째로 행실을 순결하게 하며, 일곱째로 덕망과 도덕심을 기르며, 여덟째로 견문에 밝아 두루 알며, 아홉째로 열정적이고 열의가 있으며, 열째로 정신이 민활하고 예민하며, 또 마지막 열한째로 지혜로울 것이 그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