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에 온 몸이 움츠려든다. 유독 한파가 이어졌던 이번 겨울에는 발끝까지 단단히 무장하고 나서야 문밖에 나섰다. 거리에는 이파리를 다 떨궈내고 앙상해진 나뭇가지들이 찬바람에 떨듯 흔들거리고, 길 위에는 사람들이 하얀 입김으로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총총 걸음을 재촉한다. 쌀쌀한 날씨 탓에 자칫하면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는 겨울이지만 분주한 풍경 속에 울리는 구세군 종소리에 아직 인정이 느껴진다. 사계절 중에 하필 마지막에 있다 보니 겨울에는 항상 지난 시간의 아쉬움이 묻어 있다. 그럼에도 이 겨울이 못 이룬 첫사랑처럼 아득하고 그리운 건 바로 눈 때문이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내린 눈이 만들어낸 새하얀 풍경은 볼 때 마다 가슴이 설렌다. 한 여름 소나기에 답답한 먼지가 다 씻겨 나가듯, 한 겨울의 흰 눈은 복잡한 세상을 깨끗하게 덮어버린다. 한층 한층 곱게 쌓인 눈송이가 펼쳐낸 하얀 눈밭. 도장을 찍듯 꾹꾹 눌러 발자국을 남기는 재미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신이 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걷다보면 한 걸음 한걸음이 특별하다. 마치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혼자 간다는 착각에 으쓱해지기도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며 갔노라 자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만들며 간 길. 흰 눈 위에 선명하게 발자국까지 내며 걸어온 길은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따뜻한 햇살에 눈이 녹거나, 다시 눈이 쌓여 움푹 파인 발자국을 다시 덮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미 지나온 길이 쉽게 지워지지 않듯이 흐른 시간도 절대 되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곱게 쌓인 흰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 그 발자국은 우리의 지난 삶의 흔적이 된다. 한해의 끝과 시작이 함께 공존하는 겨울. 이 겨울 안에서 흰 눈을 맞고, 그 눈을 밟는 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상 속에서 무심결에 지나치고 밟아온 우리의 발걸음을 흰 눈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까 말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디서부터 틀렸는지, 잠시 돌아서서 지나온 발자국을 살펴보자. 그 속에 답이 있기 마련이다.
티끌하나 없이 흰 도화지처럼 펼쳐진 새 하얀 흰 눈 속 풍경은 순수한 어린 시절의 동심을 떠올리게 만든다.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들고, 신나게 눈싸움을 했던 기억. 특별한 놀이가 없던 때라 하루 종일 눈썰매를 타며 코끝까지 꽁꽁 얼도록 뛰어 놀던 추억. 초롱초롱 눈동자가 마음처럼 빛나던 어릴 적, 겨울만 오면 눈이 펑펑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토록 눈을 간절히 원하는 이들이 어찌 어린 아이들 뿐일까.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도 눈은 특별하다. 특히 첫눈은 여름부터 아껴둔 손톱 끝, 분홍빛 봉숭아 물에 닿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한 꿈이다.
창밖의 쏟아지는 흰 눈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솜사탕처럼 포근한 눈 밟으며 사랑을 키우는 연인들에게 눈은 낭만이다. 로맨틱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쌓인 눈에 연인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하트를 그리며 사랑을 다짐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몰래 짝사랑하며 속을 태워온 솔로들에게는 눈은 기회가 된다. 햇빛 쨍쨍한 맑은 날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흐린 날보다 눈이 내리는 날에 사랑 고백이 성공할 확률이 더 크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렇듯 눈은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궈버리는가 하면, 차분하게 새로운 시작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차곡차곡 쌓인 눈송이가 만든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감추고 싶은 세상과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 숨어있다. 이 모든 것에 마치 면죄부를 주듯 하룻밤 사이에 순결하게 덮어버린 휜 눈. 그늘 한 점 없이 어둠까지 당당하게 삼킨 채 온통 세상을 하얀 나라로 만든 백옥처럼 빛나는 눈. 이 눈이 내려서 쌓이는 순간 작은 걱정과 근심은 흰 눈 속으로 조심스레 묻힌다. 그리고는 꽁꽁 얼어붙은 눈이 조금씩 녹아버리면 단단하게 굳었던 마음까지 차근차근 풀린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눈이 오는 날 마지막을 생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결심 하는 지도 모른다.
정확히 1년 12달, 365일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새해가 시작된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이 우리 앞에 다시 펼쳐지는 셈이다. 지난 시간 우리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 아침 흰 눈이 아름답게 쌓인 풍경에서 어젯밤의 모습이 어땠는지 상관없듯이.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또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는 것. 그런 소중한 기회가 우리 삶에 매년 주어진다는 것이다. 매서운 추위가 거듭되는 겨울, 우리의 삶을 순결하게 따뜻하게 감싸주는 흰 눈. 그 흰 눈이 쌓여 얼어붙고 녹다보면 이 차가운 계절도 어느새 지나가리라. 그러나 이 시간이 무심하고 덧없이 흘러가 버리기 전에 다짐하는 건 어떨까. 올해의 마지막, 눈 오는 날 다시 만날 겨울의 흰 눈밭. 그 곳에 남겨질 우리의 발자국이 조금 더 당당해지도록 오늘 하루도 힘껏 애써보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