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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미삼보타는 범어학자 데바비드싱하, 바라문 리피카라에게서 배운 뒤 비로소 란차lantsa 문자를 모방하여 티벳글자를 만들었다. 또 그는 문법책 여넓 부(지금은 이 가운데 두 부가 남아 있다)를 지었으며, 백배참회경을 번역하여(리테조가 지었다는 견해도 었다) 이것이 서장번경의 효시가 되었다.
불교가 유입되기 전부터 티벳에 샤마니즘의 일종인 본교가 유행되었다고는 하나, 사원이나 승려가 없었으므로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가 대체로 쉬웠으며, 손챤캄포 왕은 고급 문화인 불교를 후원함으로써 서장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힘썼다.
당시 이러한 티벳의 번영과 국제적 수교, 문화 교류의 영향으로 많은 당나라의 승려들이 티벳을 거쳐 인도로 유학했다. 현조(玄照)는 당태종 때 문성 공주를 따라 북인도에 갔고, 도생(道生)도 티벳을 거쳐 인도로 유학했으며 현태(玄太)도 티벳에서 네팔로 갔다.
서기 681년에 문성 공주가 죽자 티벳은 708년, 다시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공주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음 해에 공물을 바치면서 다시 공주를 구하므로 당나라 중종은 옹왕수례의 딸을 금성 공주라 하여 시접보냈다. 이로써 티벳은 원하는 대로 당과 사돈을 맺고 공주를 위해 한 성을 쌓아 거기에 머물게 했다.. 금성 공주도 문성 공주처럼 불법을 크게 믿어 그 홍포에 힘썼는데, 그 아들 크리손데챤은 왕이 된 뒤에 당과 수교를 맺으며 사신을 당과 인도에 보내어 승려를 청하고, 친히 정량성언(正量聖言)을 짓기도 했다. 747년에는 인도 뱅갈 승려인 선해대사 적호(寂護)와 북인도 카프리스탄 승려 연화상생사(運華生上師)를 초대하여, 749년 삼야스 사원을 세우고 두 승려를 모셨다.
적호는 중관종(中觀宗)의 논서를 가져와 이제분별석(二請分別釋)을 짓고 중관의 교법을 알렸다. 연화상생사는 다라니 빛 진언(眞言)을 보급하고 집금강견행근본주(集金剛緊行根本呪)를 번역하여 크게 밀교를 전파하였는데, 이로써 티벳에 처음 밀교가 들어와, ‘비밀고파(秘密古派)’라 일컫게 되었다.
그밖에 카말라실라와 바이로차나라크쉬타도 티벳에 들어와 불정을 번역하며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카말라실라는 중도장엄석(中道莊嚴釋)을 비롯하여 중관종에 관한 여섯 권의 책을 지었으며, 유가파(喩伽派)의 당나라 승려 대승화상(大乘和尙)과 삼야스 사원에서 대론하여 대승하상을 꺾음으로써, 크리손데챤 왕은 중관종을 정교(正敎)로 정해 홍포하였다. 바이로차나라크쉬타도 팔고분게(八苦分偈)와 발신등명(發信燈明)을 짓고 수렌드라보디Surendra-bod-hi와 함께 화엄경을 번역하여 현교(顯敎)를 드날렸다.
크리손데챤 왕은 다시 밀교를 일으키고자 인도에 번역관 바이로차나, 카바팔제그, 클루이걀, 예스다, 암만주 들을 보내고, 붓다구하를 초청하여 몸소 비로자나성도경집의(昆盧遮避那成道經集義), 바로자나성도경소(疏), 비경의입문(秘’經義入門)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 아들 무티그챤포 왕은 카바팔제그, 조스키닌포, 하담팔기룬포를 시켜 경전 편찬의 효시인 ‘hphan-than’ 목록을 만들게 하였다.
816년에 그 뒤를 이은 클리랄파칸 왕은 도량형을 도입하여 경제 구조를 새롭게 바꾸었고, 티벳어를 고쳐 다시 만들었으며, 많은 불교의 경(經)과 논(論)을 번역하고 이미 번역된 것은 다시 다른 책과 대조하여 충실한 번역이 되게 하였다. 각종 어구를 초록한 번역명의대집(翻譯名義大集)이 편찬된 것도 이 때이며, 주로 반야, 보적, 화엄, 반야부(部)의 경전이 해석되어 중관파가 유행하였다.
클리랄파칸 왕은 불교를 반대하는 본교도의 미움을 사서 899년에 동생 란다르마에게 살해되었는데, 뒤를 이은 란다르마는 어리석어 국정을 어지럽히며, 불경 번역을 막고 승려를 환속시키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법성(法成)은 이 때 돈황으로 피신해 제성모다라니경(諸星母陀羅尼經), 반야바라밀다심경을 티벳어로 번역하고, 한문으로 번역된 능가아발다라보경 (楞伽阿跋多羅寶經), 금광명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 현우경(賢愚經), 천수경 들을 티벳어로 번역하였다.
란다르마 왕이 다시 불교도에 의해 살해되면서 예세스호가 왕이 되어 쇠퇴한 불교를 진흥시키는데, 이것이 불교의 전래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어, 575~970년을 초전(初傳), 그 이후 971~1289년을 후전(後傳)이라 한다. 예세스호 왕은 인도에서 많은 밀교 경전을 들여와 번역하는 데 힘썼다.
그 무렵 티뱃에서는 계율을 중시하는 중관(中觀)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고, 밀교는 다만 본교를 대신할 정도일 뿐이었다. 그때에 마침 밀부의 경전이 모두 번역되자 전 불교를 현승(顯乘)과 밀승(密乘)으혹 나누게 되었다.
현승은 다시 성문, 독각, 보살의 삼송으로, 밀승은 작밀(作密), 수밀(修密), 상응밀(相應密), 무상상응밀(無上相應密)의 사승으로 나뉘었다.
작밀은 진언 독송, 공양 의식, 결인법(結印法), 호마궤의(護摩軌儀), 관정의식(灌頂儀則)을 설한다.
수밀은 삼매관정(三味灌頂)을, 상응밀은 여래, 금강, 보생(寶生), 연화(運花), 갈마(羯磨)의 다섯 부(部)를, 방편과 혜(慧)로써 가르친다. 방편의 주요 경전은 최상근본대락 금강불공삼매 대교왕경(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이고, 혜의 경전은 반야이취경(般若理趣經)이다.
무상상응밀은 쾌락을 목적으로 하여, 계율을 버리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음란한 행동으로써 위없는 부처님 경지에 도달한다는 주장을 한다. 무상상응밀에는 부밀(父密), 모밀(母密), 무이밀(無二密)이 있는데, 무이밀은 ‘비밀신파(秘密新派)’라고도 한다.
이 비밀신파와, 연화상생사가 전한 관념수법(觀念修法)의 밀교인 비밀고파를 합하여 린마파 또는 ‘대구경파(大究竟派) ‘라 부르는데, 연화상생사를 개조로 하고 돌제라그 사원과 민도린 사훤이 중심이 된다.
예세스호 왕은 그무렵 본교를 대신할 강력한 밀교를 바라고 있었다. 중관종이 교세를 떨치면서 밀교 교단 내부는 타락해 갔고,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균형있는 종교 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은 1026년 인도 갠지스강 연안에 있는 비크라 사원에서 아티사를 초청하여 밀교를 중흥시키려 했다.
아티사는 보살행경우바리사(菩薩行經優婆提舍), 보리도 등론(菩提道燈論)을 비롯하여 삼십 여권의 책을 지었다. 그는 현승과 밀승이 서로 화합하고, 계율을 지키며 선정과 관법(觀法)을 닦을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라사 부근의 시탄 사원에서 입적하였다.
아티사의 제자 룬톤은 그 법을 이어 1055년 타란 사원을 짓고, 비밀상락(秘密上樂)을 금지하고 카담파bkah-gdam -pa의 일파를 세웠는데, 여기에서 카규파, 시데파, 사카파, 조난파의 네 종파가 나뉘게 된다.
이들 네 종파는 대체로 현교를 가벼이 여기고 밀교를 구경성불에 이르는 길로 삼는다. 그러나 밀교는 한편으로 인도의 성기숭배와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차츰 문란해졌으며, 거기에 본교와 시륜경(時輪經)의 영향이 커지면서 점점 타락해 갔다. 이것은 티뱃 밀교의 큰 한계점이었다.
십사 세기 중엽, 총카파는 교의 퇴락을 막고 밀교를 바로 잡고자 대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새로이 반야중관(般若中觀)과 비밀금강승(秘密金剛乘)과의 융합을 꾀하면서, 게루그파dge-lugs-pa를 열어 엄격한 계율과 세존 당시의 원시교단처럼 탁발과 독신 수행을 주장하였다. 옷차림도 누런 빛깔의 옷과 모자로써 달리하였다. 총카파가 제창한 신교를 이전의 구파(舊派)와 구분하여 황모파(黃帽派)라 하는데, 총카파는 ‘달라이 라마Dalai-bla-ma’l) 의 시조가 되었다.
총카파의 제자 게둔두는 1439년 왕이 되어, 게루그파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먼저 다시룬포 사원을 짓고 계율도 새로이 만들었다. 게루그파의 수행자는 먼저 우파사아카계와 사미계를 받고 범패와 같은 게송을 외운 다음, 인명석론(因明釋論)을 비롯한 경전과 밀교를 배운다.
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티벳 불교는 티벳 고유의 라마교Lamaism로 발전하였으며, 이로부터 황모파의 기원을 기리는 ‘몬람smonlam’이라는 종교제가 국가 행사로 열리게 되었다.
라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보다도 살아 있는 개인으로서의 라마(라마교의 고승)를 존중하는데, 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2)는 각각 관세음보살과 아미타여래의 화신으로 추앙되며, 종교와 정치를 다스리고 었다.
이는 몽고 제국의 쿠빌라이가 티벳을 정벌했을 때 불교가 번창해 있었으므로, 티벳 민족을 회유하기 위해 쿠빌라이가 1260년, 고승 파스파를 국사로 모신 것에서 비롯된다. 티벳에 한 사람의 지도자를 두면 힘이 강해져 통치하기에 어려우므로, 지도자를 두 명으로 함으로써 정치적 견제를 노렸던 것이다.
태조 누르하치는 새로 몽고 문자를 만들도록 하고 파스파를 제사대보왕(帝師大寶王)이라 봉하고 세습하도록 했다. 1310년에는 약 삼십명의 학자들을 시켜 방대한 티벳장경을 몽고어로 옮기게 하고, 한역과 대조하여 수정토록 하였다.
법치제가 성립되면서 달라이 라마는 권력을 굳히려고 종래의 다른 종파를 누르고 그 재산을 사유화하였다. 라사의 붉은 언덕에 포달라(관음) 사원을 짓고 자신은 관음의 화신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활불사상(活佛思想)으로써 성직자에 의한 절대 권력 구조를 정착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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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라이’는 몽고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벳어로 무상(無上), 승자(勝者)라는 뜻으로, 달라이 라마는 티벳 라마교의 교주를 말한다. 수도 라사의 북부에 있는 포달라 궁전에 살며, 보살의 화신이라 하여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고, 활불(活佛)이라 일컬어진다. 1391년에 창시되었다.
2) 티벳 서부에서 정치와 종교의 두 가지 권리를 장악한 라마교의 우두머리. 달라이 라마에 버금하는 서열(부교주)로서, 총카파의 후계자이나 티벳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생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