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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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지성┃호주 멜버른 유학생
2010년 12월 346호

3년 만이다. 한국의 가을. 해인사 일주문에 떨어진 낙엽만큼이나 노래진 황금들판, 그 속에 쌀알 알알이 품은 고개 아픈 벼, 그 벼만큼이나 한 풀 수그린 태양, 그 태양만큼 높아진 청명한 하늘, 그 속에 옅은 구름 한 점 그리고 그 아래 나. 호주 멜번에서 3년차 유학생이던 나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한국에서의 여유로운 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이유로 일 년 휴학계와 함께 학업이란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래왔던 여유를 찾아 따뜻한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던 5월 초 4박 5일 제주도 자전거 순례를 필두로 여름 첫머리에 6박7일 전라도 자전거 순례, 찌는 폭염 속 24박 25일 국토 대장정, 늦여름 때 아닌 장마가 찾아왔던 8월 말 8박 9일 나 홀로 기차여행까지 굶주렸던 다이어트 후 터져버린 식욕과 같이 나의 역마살은 나를 꾸역꾸역 방랑과 경험의 길로 몰아세우며 그 욕심을 채워나갔다. 새까매진 팔다리에 겨우 노란 빛이 돌아올 때 즈음, 나뭇잎도 한 잎 두 잎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 ‘때가 왔구나!’ 싶어 단풍 보러갈 명산을 찾느라 눈은 벌써 컴퓨터에 손은 마우스 위를 바쁘게 오갔고 머릿속에선 언제 가면 좋을지 누구와 함께 가면 좋을지를 생각하면서 또 한 번 그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 때 내게 주어진 단어 하나. 가을.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 글의 소재가 나의 역마살의 치기에 제동을 걸어 주었다. 글을 쓰려 가을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던 그 때. 그제야 느꼈다. 무언가를 크게 잃어버린 기분. 한참동안 꺼내어 보지 않았던 습관. 가슴 한 구석에서 먼지 켜켜이 쌓여있는 오래된 옛 습관이 떠올랐다. 나는 어릴적부터 계절의 냄새를 맡곤 했는데, 한 계절이 지루해 질 때 즈음 찾아오는 새 계절의 냄새가 감지되면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색깔들의 변화보다 형언할 수 없는 새 계절의 냄새가 나를 더 설레게 했고, “아~ 여름 냄새 난다”, “ 아~ 겨울 냄새 나는 거 보니까 진짜 겨울이 오는 구나!”라고 말하면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이상한 아이 취급 받기 일쑤였는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느끼는 특별한 능력이 나에게만 있는 것 같아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런데, 내 후각이 이 신기한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제법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는 지금까지 가을 냄새를 맡질 못했다. 게다가 이 감각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 조차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단풍 구경 따윈 이미 관심 밖이었다. 가슴 속은 온통 좋은 습관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 찼고, 머릿속엔 온통 소중한 능력을 썩혀 버린 것에 대한 자책감이 가득했다. 언젠가부터 어른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나? 감성을 잃는 것 또한 하나의 과정인가? 무엇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자송自訟이 사유에게 물었고 사유가 반성으로 답했다.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를 느끼고자 했던 올 한 해. 그리고 ‘여유’의 한 형태로 선택했던 여행들이 갈망하던 한국 대학생활의 호기 어린 로망을 일 년 안에 펼쳐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 돌아가겠다는 목적 아래 어느덧 욕심으로 변질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욕심에 가려 본디 의도했던 그 넉넉함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이 데리고 오는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찾아다니던 ‘여유’였고 충분히 찾았다고 자부했지만 계절에 맞춘 여행에 급급해 계절이 오는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여행 자체가 어느덧 목표가 되어 많은 경험 많은 섭력涉歷 ‘좀 더 많은 것’만 채워가느라 그것을 오감으로 체득할 시간도 가슴으로 느껴볼 여유도 없었다. 많은 것을 보고 체험했지만 정작 내 자신이 풍요로워진 것 또한 없었다. 여행 후 경험담을 늘어놓던 기억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너무 그리웠다. 내가 놓친 2010년의 봄 내음, 여름 내음 그리고 마음의 넉넉함. 빈껍데기뿐인 한해를 보낼 뻔 했는데, 참 다행히도 아직 겨울이 남아 있다. 이제야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비록 어디에도 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이 넉넉해지는 게 왠지 잃어버렸던 계절의 냄새를 오는 겨울엔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계절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