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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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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연주┃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2010년 12월 346호
벌써 겨울의 자락에 들어섰나?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고 저녁 산책 나갈 준비를 하였다. 가을을 느낄 겨를도 없이 갑자기 다가선 쌀쌀한 날씨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든다. 해가 져 버린 아파트 보행로를 산책하면서 가로등 불빛 아래, 아직도 화려한 자태를 불태우고 있는 가로수 단풍을 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가로수의 단풍을 보는 즐거움이 깊은 산의 화려한 단풍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도심의 밤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느끼는 가을 정취도 제법 괜찮다.
대학 시절, 단짝 친구와 가을을 찾아서 떠난 곳이 해인사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을 올라가니 예쁜 기와지붕이 나타나 ‘아 저곳이 해인사 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하니 그 곳은 절이 아니고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을 마주하고 넋을 잃었다. 당시 해인사에 대한 기억은 그저 가을을 즐기기 위해 잠시 들른 여행지 였을 뿐, 해인사의 대웅전이나 세계문화유산인 장경각과 팔만대장경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올해 어머니의 권유로 올해 해인사의 비로자나불 무생계(보살계) 수계 대법회에 함께 참석하게 되면서 해인사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 동안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지난 2년 동안 고생을 하셨고, 지극한 불심으로 차츰 차츰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시다. 어머니의 지극한 불심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놀이문화나 즐기는 철부지의 시선에서 이제는 부처님의 법을 알고 싶은 초심자의 마음으로 해인사를 찾으니 모든 게 신기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원래 불법과 인연이 있는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기록문화를 다루는 직업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2001년 조계사의 조계종 사찰 기록물 정리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사찰기록을 접하면서 불교에 대한 흥미로움이 깊어졌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점점 내 마음에 와 닿는다. 그저 새벽예불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 해인사 새벽 예불의 독경소리는 아름다운 선율로 온 몸을 때렸고 사찰주변의 풀 한포기와 주련의 글귀 한 구절 한 구절들이 예사롭게 보아지지 않았다.
사찰 주위의 불타는 단풍들을 보니‘무심코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자기 갈 길을 찾아가듯이 나도 불법의 심오한 이치를 찾아가는 것이 내가 가야할 정해진 길이 아닐까 ?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굴레에 갇혀 그것에 집착하면서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이라는 체제 속에 내몰리면서 생활하고 있다. 좀 더 넓고 큰마음을 쓸 줄 모르고 살며, 또 양보를 하면 마치 경쟁의 낙오자가 될 것 같은 순간순간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 자신도 그런 시스템 속에서 무던히 발버둥 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되기도 한다.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단풍이나 낙엽들은 어느 누가 길을 일러 주지 않아도 혼신의 힘으로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불사르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의 품속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일생을 보낸 낙엽들은 화려한 몸짓이나 떠벌림 없이 제 역할을 다하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데 망설임이 없다. 이러한 모습을 보니 우리가 사는 삶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착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어쩌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소용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을 스스로 속박해 왔던 여러 가지 상황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자연의 품속에서 일생을 보낸 단풍이 자신의 자리로 미련 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범해각안 스님의 임종게를 떠올렸다.

망인제연희칠년 妄認諸緣希七年 헛된 인연 잘못 알고 살아온 77년이여!
창봉사업총망연 窓蜂事業摠茫然 창가에 부딪치는 벌처럼 해온 일도 부질없어라
홀등피안등등운 忽登彼岸騰騰運 훨훨 털고 문득 저 언덕에 올라가면서
시각부구해상원 始覺浮漚海上圓 비로소 바다 위에 거품인 줄 이제 알았네.
- 범해각안梵海覺岸스님이 남긴 임종게臨終偈, 지안스님의 번역(선시산책 중에서)-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내 것이라고 믿으며 집착해온 삶이 그저 바다위에 거품처럼 부질없음’을 깨우쳐 주시는 내용인 듯하다. 아마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제 역할을 다하고 제 자리로 미련 없이 돌아가는 낙엽은 이런 한탄은 하지 않으리라.
이번 무생계법회에서 만난 사찰 주위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내 것에 대한 집착’, ‘나 자신’이라는 아상我想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무생계법회를 다녀온 이후 날마다 백팔 참회로 몸과 마음을 다지면서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하였던가? 부처님을 만나면서 나 자신이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생각대로 업무가 처리되지 않으면 초조와 불안 속에서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였는데, 불교를 알아가면서 이제는 한발 떨어져서 현실을 바라보고 편안한 시선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도 있게 되었고 시절인연에 맡기는 법도 조금 알아가고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으며, 법신의 푸른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겠다는 서원도 세워본다. 오늘 밤길에서 만난 아파트의 때늦은 단풍이 밤바람에 사르르 떨리면서 마지막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