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불교에서 오래된 논쟁 중에 하나가 바로 돈수(頓修,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와 점수(漸修,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을 해야 한다는 관점)에 대한 부분이다. 어찌보면 육조 혜능선사의 남종선이 선의 주류를 이룬 이후 돈오돈수에 대한 견해가 더 우월한 것이 되었는데, 이 돈수에 대한 이해를 해야 남종선의 특징이 한눈에 들어 올 수 있다. 혜능스님에게 돈수법문을 받은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선사에게 제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이 법을 전해 받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남악회양선사께서 암자 앞에서 기와장을 갈고 있었다. 마조 스님은 모르는 채 보지도 않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물었다.
“무엇을 하십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가 다시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 가지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기왓장을 갈아봐야 거울을 만들 수 없는데, 좌선을 한다고 앉아 있은들 어떻게 부처가 되겠느냐?”
《마조록馬祖錄》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직관 묘미와 직관을 통한 공적(空寂)의 깨달음과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만 있는다고 공부가 되겠는가하는 이야기이다. 무슨 일에든 본말이 있고, 본질이 중요하듯이 특히 선에서 중요시 하는 것이 ‘성품’ 혹은 ‘본질, 마음’ 등으로 불리는 ‘그 무엇’이다. 그 본질에 대한 자각이 없이 그냥 좌복 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수행의 진전이나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악 회양화상께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마음 속에는 기왓장이 아닌 맑은 거울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스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원래 거울이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견성의 순간이니라.” 이렇게 젊잖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이 그렇게 마음과 귀에 쏙쏙 들어왔겠는가 말이다. 본성의 깨달음 없는 좌선은 의미 없는 것이며, 마음 속 불성이 이미 밝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단박에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의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가 본시 청정하므로 그 심성이 스스로 깨끗함을 깨닫는다는 의미)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 경전의 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에 대한 근거를 일탈된 행동과 비유의 한마디로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들 고사를 살펴보면 진리를 설명하는데 치밀한 논리나 설명은 생략되어 있고, 강력한 은유를 통해 직관적 자각을 유도하고 있다. 즉 마음의 청정함(空)을 깨달으면 그 순간 부처에 이를 수 있다는 단순하고 간결한 결론은 선불교의 큰 강점이다. 한편 그 결론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방법 또한 신속하지만 은밀하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아득한 일이지만, 마음을 내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상상력의 세계를 충분히 보장하고 있다. 직유법이 아닌 은유법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던지는 것이 공이 아닐 뿐이지 던지는 내용은 직구 그 자체이다.
선화에서 어떤 사물을 소재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그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선의 화두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청나라 때 대표적인 선화가였던 주답 즉 팔대산인의 <팔팔조>라는 그림 속에는 졸고 있는 새 한 마리를 같은 가지에서 뻗어 나간 나뭇가지 위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새 한 마리가 굵고 거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망국의 설움을 묻고 승려가 된 팔대산인의 그림 속에는 이처럼 화두와 같이 강하고 간결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소재와 붓질이 담겨 있어 선화를 감상하는 맛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