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편이지만 요즘 패션이나 인테리어, 가구 관련 광고 카피를 보다 보면 ‘젠 스타일(Zen Style)’이란 말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프라다와 요지 아마모토, 질 샌더와 같이 간결한 옷을 추구한 이들이 젠 스타일을 적극 선보이고 있으며, 생활용품 매장이나 각종 여성지에서도 화려한 장식이 덜한 간결한 디자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2000년을 전후해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스타일 중 하나인 ‘선禪’이 이젠 디자인을 넘어 라이프 스타일로 전환되고 있는 느낌이다. 건축, 옷, 소품, 화장품, 가구, 그릇, 식당, 요리, 책, 음악, 영화에 이르기까지 디자인뿐 아니라 예술계에서도 화두로 등장하고 있을 정도다. 좌선과 명상, 절제, 정갈함, 고요함, 자연스러움…. ‘선禪’에서 떠오르는 이런 요소들이 패션과 인테리어, 헤어-메이크업 등 스타일 모든 분야에서 각광 받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젠(Zen)’이란 일본에서 유행시킨 언어로 스즈끼 다이센스가 구라파에 전하면서 ‘선禪’이 ‘젠’으로 불리게 된 말. 한국에서는 ‘선(Seon)’, 중국에서는 ‘챈(Chan)’으로 발음된다. 이젠 국제적으로 ‘젠’이라고 통용되는 이 스타일은 패션 전반에 불어닥친 ‘자연주의’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더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나친 물질ㆍ기계문명에 식상한 서구인들이 동양의 정신문화인 ‘선’에서 본격적으로 대안을 찾기 시작한 셈이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부분적 활용은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요즘처럼 통합적으로, 정신세계까지 파고드는 일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경향이란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젠 스타일은 20세기 후반, 동양의 전통 공간미를 추구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서구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중성적인 멋을 살리는 것에서 비롯됬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젠 스타일은 서구 모더니즘에서 발원, 90년대 들어 유행을 주도해온 미니멀리즘과는 ‘체온’에서 구분된다. 인위적 장식과 거추장스러움을 털어내고 간결함을 추구하는 점은 같지만, 젠 스타일은 자연을 살려 좀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이 검정과 흰색을 날카롭게 대비 시키는 인공적 느낌이라면, 젠 스타일은 창호지와 같은 부드러운 흰색, 붉은기 혹은 밤색기가 도는 따뜻한 검정으로 자연스런 색감을 연출한다는 식이다. 또한 젠 스타일에는 미니멀리즘이 즐기는 흑ㆍ백색 같은 무채색 외에도 밤색, 카키색, 겨자색, 보라색 같은 차분하면서도 자연과 가까운 색들이 살아있다. 번쩍번쩍 화려한 광이 나기보다 실크와 같이 은은하고 부드러운 윤택이 젠 스타일이 갖는 질감이기도 하다.
마음의 평화를 중시하는 젠 스타일은 색조 뿐 아니라 기초 화장품에도 도입되고 있다. 프랑스 화장품 회사 ‘랑콤’은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이드라 젠’을 개발, 국내에 시판 중이다. 메이크업 전문가들은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 표현, 차분한 밤색톤의 새도, 섀도로 자연스럽게 그린 눈썹, 입술의 은은한 반짝임 등을 젠 스타일로 보고 있다.
젠 스타일이 특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분야는 인테리어 부문이 손꼽힌다. 동양적인 여백의 미를 미니멀하게 처리한 젠 스타일은 대나무와 나뭇잎이 디자인의 모티브로 사용되며, 브라운, 카키, 바이올렛 같은 차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컬러를 주거공간에 부여하여 따뜻한 느낌을 연출한다. 동양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는 젠 스타일의 특징은 부드러움, 간결함, 따뜻함, 공간의 여백으로 대변된다. 자연적이고 따뜻하게 표현하는 것이 강점이며, 테이블은 무릎 아래로 낮아졌고, 바닥에 앉는 좌식 가구를 사용한다. 바닥은 가라앉은 듯한 진한 갈색톤으로, 스틸이나 유리선반, 흰색이나 회색으로 단순한 벽 마감을 드러낸다. 조명기구는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하되 가는 스틸 프레임에 한지를 이용한 스탠드와 같이 선이 강조된 심플한 디자인의 조명을 사용한다. 풍성한 한아름의 꽃보다는 가늘고 단아한 꽃의 매무새가 공간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을 수 있듯이, 젠 스타일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한 돌, 철재, 나무 등 소재의 소품으로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차분한 자연미를 추구하는 젠 스타일의 미학을 볼 때, 현대 문명은 언제나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 같다. 젠 스타일 붐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신비감에 의해 찾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서양의 구원과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찾아야 하는 문화적 현상이며 경향이라 해도 지나친 해석은 아닐듯 싶다. 서양에서 한때 정신적 자유를 추구한 히피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듯이, 오늘의 젠 스타일 붐도 완전한 자유와 텅빈 충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몸짓인지도 모른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이 오히려 역수입 되어 우리에게 전통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러니이긴 하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갈고 다듬은 선禪의 문화와 서구문화를 원융하게 조화시킨다면 새로운 문화창조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국내에서는 젠 스타일에 대한 개념 정의와 학술적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불교계에서는 ‘젠’이 일본식 발음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의식주 등 생활과 문화전반으로 확산일로에 있는 젠 스타일에 대해 더 이상 무관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늦었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젠 스타일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해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불교문화가 민족문화를 융성시켰듯이, ‘선 문화’가 우리 시대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선禪은 현대인이 혼탁한 생활속에서 잃기 쉬운 자신의 정체성{본래면목)을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올곧은 길인 동시에, 스스로의 양심에 정직하게 다가서는 절대 긍정의 길이자 행복 실현의 지름길이다. 간화선을 표방하며 선종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한국불교에서 ‘선禪 스타일’의 문화현상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선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ㆍ확산시키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포교 전략과 방편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