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흥사로 오르는 장춘리長春里 길엔 아무도 없었다. 봄이 와서 가장 길게 머물다 간다는 그 길에 슬며시 찾아든 것은 온 줄모 모르게 사라질 가을이었다. 허나 무엇이 길고 무엇이 짧은들 모두 사라지고 없는 무상한 것, 마음의 쓸쓸함을 비질하듯 천천히 장춘리를 걸어 대흥사를 찾았다. 큰 절 마당엔 천년이 넘은 연리근만 그 다정을 말할 뿐 아무도 없었다. 고요 속에서 이따금 감잎이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스님의 처소를 찾으니 스님 또한 고요히 차를 달이고 계셨다.
“난 명상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해요.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아요. 난 전생에도 금생에도 내생에도 수행자인 것 같아요.”
2007년도에 대흥사 주지 소임을 맡은 범각스님이 대흥사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것은 68년도, 열살 무렵이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서울의 비구니 절에 살게 되었는데, 여섯 살 되던 해에 천운 큰 스님이 그 절에 들렀던 것이 연이 되어 큰 스님 손을 잡고 구례 화엄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염불은 듣는 대로 다 외고 절집 생활도 잘 따르다보니 여덟 살에 지암 스님의 수계를 받았다. 그러고나서 다시 큰 스님 걸음을 따라 큰 스님의 커다란 걸망을 짊어지고 찾아든 곳이 바로 대흥사였다.
“대흥사는 서산 큰 스님의 호국정신과 선교를 일원화시킨 정신이 서려 있고, 초의 스님의 차선일미 법희선열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량입니다.”
차의 성지인 만큼 예전에는 야생차나무가 굉장히 많았단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정에 많은 차를 올려야 했던 탓에 스님들이 차나무를 많이 없애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대흥사 주변의 산기슭에는 야생차가 많다. 스님이 내어주시는 차도 대륜산 야생차인데 그 맛이 맑고 은은하다. 식물 중에서 최고의 음식으로 치는 차, 그것도 재배차가 아닌 야생차는 다근이 아닌 하나의 직근이 깊이 내려가 광물질을 빨아들이는 것이라서 그것의 효능이 의학적으로도 뛰어나다며 스님 또한 초의선사와 같이 차를 많이 마실 것을 권하신다.
“초의선사께서 동다송, 다신전을 지어 일반인들이 차를 즐길 수 있도록 했지요. 차를 재배하는 법, 법제하는 법, 행다까지. 우리나라에 차를 정립시키고 체계화시킨 분이 초의 스님입니다. 이 분이 대흥사 스님이시지요. 그래서 대흥사는 유달리 차가 유명해요.”
그것에 이어 범각스님은 대흥사를 찾는 신도들이 차례상에 술 대신 차를 올리기를 권장하고 있다. ‘차례茶禮\'라는 말 자체가 조상님들께 차를 올린다고 해서 지어진 말이다. 신라, 고려시대엔 차를 올렸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해 차 대신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다툼이 생기는 것이라며 스님은 ‘차례’라는 의미를 복원시켜 술이 아닌 차를 올리기를 권한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기를 바란다. 그런 것이 바로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초의문화제‘의 정신이기도 하다.
“대흥사는 한국 불교의 종가宗家입니다. 서산스님의 선가귀감에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 율시불행(律是佛行),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 율은 부처님의 행위이니 이 선,교,율은 모두 부처님의 한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씀이 있지요. 숭유억불 당시 불교의 계파가 상당히 많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하나도 통합하신 것이 바로 서산 큰 스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서산 스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서산 스님은 돌아가시며 자신의 모든 유품을 땅 끝에 있는 대흥사에 두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이 왜 그곳을 원하시는지 여쭈니, 스님은 그곳이 만세불훼지지萬歲不毁之地요,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 하셨다. 즉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고 천재와 지재와 인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 답하셨다. 또한 종통소쉬지처宗統所歸之處라 하여 자신의 유품으로 법통이 크게 일어날 것, 즉 서산 스님의 법이 대흥사로 와서 크게 일어난다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에 따라 서산스님의 유품이 대흥사로 오게 되니 13명의 종사, 13명의 강사, 총 26명의 훌륭한 스님이 배출되었다.
현재 대흥사엔 서산 큰 스님의 박물관이 불사 중이다. 원래 박물관이 있었으나 상태가 좋지 못해 범각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불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서산대사와 초의선사를 기리기 위해 서산대제와 초의문화재를 매해 열어 나라 사랑 글짓기 대회, 사생 대회, 보살계 수계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스님은 동국선원 기존의 선방이 협소하고 좋지 않아서 한 사람이 한 방을 쓸 수 있도록 다시 새롭게 지었다. 그래서 이젠 전국에서 방부를 들이려고 줄을 설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새벽숲길걷기,1박2일 등의 다양한 템플스테이도 진행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중심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스님과 함께 자박자박 걸어 저녁공양 하러 가는 길. 스님이 멈춰서더니 현판을 가리키며 일러주신다. 초의스님이 머물렀다는 ‘일로향실一爐香室’, 작은 화로에 달인 차 향이 가득한 방. 그리고 추사가 머물며 직접 썼다는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대한 설명도 해주신다. 그러며 다시 공양간으로 향하는 길에 말씀하신다.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서 스님들 손에 자라다보니 부처님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해요. 내가 여러 절의 주지를 하면서 느낀 것은 부처님 밥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소임이든 철저하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스님은 총무원 문화사회국장을 지낸 적도 있고 목포 달성사 주지를 거쳐, 대흥사에서 기획국장, 총무국장 등의 많은 소임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월출산 도갑사 주지로 지내며 11대 종회의원도 지냈고 초심 호계의원으로 일했으며 현재는 대흥사 주지로 있으며 재심 호계의원도 맡고 있다. 승납이 많다보니 도반들보다 빠르게 많은 일을 해오며 살았다. 맡을 수 있는 소임은 다 맡아 본 듯하다는 게 스님의 가벼운 소감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평생을 살아왔으니, 그 말씀처럼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그 세월을 짚어보게 된다.
“난 전생에 비구님 스님이 아니었나 싶어요. 옷을 입는 것이나 성품이나 비구니 스님들 방식이 참 편해요. 전생에 원력을 좀 세웠던 것인지 이번에 비구 스님 몸을 받아서 나온 것이란 확신이 들어요. 그런데 스님이 되는 공덕은 지었는데 다른 것은 못 지었던 것 같아. 그래서 금생에 부처님 일을 상당히 열심히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다음 생엔 좀 더 나은 비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스님은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48년간 살아오면서 스님으로 사는 것에 단 한 번도 후회나 미련이 없었단다. 언제든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큰 보람을 느낀단다. 하지만 출가는 자기 의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본인의 의지 없이 절에서 자라온 스님에겐 두 번 정도의 재발심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로 인해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 같단다.
“어려서부터 절에 사니 절에서의 삶이 습관적으로 길들어져 있던 거예요. 염불도 앵무새가 외듯이 한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신도님들로 인해 깨우쳤지요.”
다른 절의 주지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할머니, 어머니 같은 신도분들 앞의 스님이 스님답지 못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부처님 앞에 서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서야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앞에 설 때는 진실된 마음으로 간절하게 서야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소임을 사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게 된 때가 있었는데, 손실을 보고나서는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소임을 보게 되었다. 절 생활이 너무 일상으로 젖어 있다 보니, 그걸 깨닫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러야했다.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출가하고 교육 받은 이들에 비해 늦게 알게 되는 부분이란다.
“다행스럽게도 깨우쳐서 주인의식도 갖고 끊임없이 내 자신을 바라 볼 수도 있게 되었죠.”
스님은 자꾸만 밖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 현대인들이야말로 안에서 답을 찾는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가 이 나라에서 1700년의 세월을 주도해왔기에 우리는 불교적인 삶을 살아 왔고, 삶은 역사이고 문화이고 예술이기에 우린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불교를 모르면 근본을 모르는 것이란 말씀이다. 시간 생활을 하면서 공간적인 결과를 얻어 살지만, 공간적인 결과는 영원한 것이 아닌 무상한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윤회한다는 것, 윤회는 인과와 연기에 의한 것이니 인과와 연기를 제대로 알면 그것이 깨달음이고 해탈이고 성불이라는 말씀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해놓은 것이 법구경이지요. 큰 스님들의 게송이 법구경이에요. 그 게송이란 것은 시이지요. 시詩라는 한자를 보면, 절에서의 말씀 즉 부처님 말씀입니다. 또한 시時라는 글자를 보면 절에서 날을 맞는 것이지요. 이런 말들만 보아도 우린 모두 불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불교를 알려고 하지 않아요.”
스님은 깨달음은 지극히 자유롭고 부드럽고 긍정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라 하신다. 상대에게 지극한 편안함과 행복과 안락을 주는 사람이 수행자이며, 진정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스님은 늘 탈권위적이고 탈위악적인 것을 말한다.
“나는 내 상좌들과 신도들을 똑같이 대해요. 사람은 하루를 더 살수록 더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스님께 원력을 여쭙자, 대흥사가 스님들만의 도량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사찰이었으면 하는 것이란다. 그것에 이어 스님은 개인적인 원력을 말씀하신다.
“그동안 이런 저런 소임 살면서 연륜을 쌓았으니 이젠 부처님 경전을 철저하게 한번 보고 싶어요. 너무 일찍 절에 와서 멋모르고 공부했는데, 이젠 진정으로 공부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이제 수행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요.”
이제 시작이라는 범각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스님의 처소에서 나오니 마당이 캄캄했다. 그 밤에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해 창문을 열고, 마당에 편히 자리를 펴고 누운 고요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마음 소란이 다 물러가는 듯했다. 그리고 자꾸만 범각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수행자란 말이 그렇게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