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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한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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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미경 2010년 11월 345호
작년 가을, 시민선원에서 알게 된 보살님을 만나러 월명암에 갔다.
월명암은 전북 부안군 변산면에 있는 암자로, 풍광이 빼어나며 아름다운 곳이다. 월명암은 통일신라시대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중의 한 분으로 손꼽히며, 부설거사, 묘화부인, 아들 등운, 딸 월명한 가족 네 명이 모두 수도, 도를 깨친 곳으로 유명하다.
부안에서 버스를 타고, 변산면 소재지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가면 남여치로 월명암 등산로 초입이다.
여기서부터 한 시간 정도 산길을 걸어가야 월명암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이다.
“천천히 걸어도 5시 전에는 도착하겠지.”
대체로 절에 저녁 공양시간이 5시이니까, 공양시간은 지켜야 된다. 산길은 두세 명이 올라가기에 딱 좋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뭇잎들은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다. 길은 험하지는 않은데 계속 오르막이다. 서서히 지쳐서 앉아서 쉬기로 하고 물도 마시고, 가지고 간 귤도 먹으면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한 시간 정도 걸어 오르다 보니 드디어 월명암이다.
입구에 위치한 자그마한 텃밭엔 고소와 겨울 김장용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고, 큰 감나무 두 그루엔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돌계단을 뛰어올라가 “보살님, 저 왔어요!”
인기척이 없다. ‘아무도 없으신가.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인사나 드리자.’
가방을 벗어놓고, 대웅전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삼배를 드렸다.
대웅전에 앉아서 산을 내려다보니, 산이 아니고 남해안의 올망졸망한 섬들처럼, 꼭 바다위에 섬이 떠 있는 것 같다. 부안호의 물안개가 안개처럼 산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운해다.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보살님이 삽살개 진순이와 네 마리 새끼를 데리고 오셨다.
“언제 왔냐? 배고프겄다! 얼렁 밥해서 묵자. 부처님께 인사는 했제?”
“예,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한 참 있었는데, 주지스님은 어디 가셨어요?”
주지스님은 출타중이시고, 공양주 보살님은 긴 휴가중이고, 삽살개 진돌이는 등산객을 따라 가출 했다고 하신다.
절에는 보살님과 나, 진순이 그리고 새로 태어난 누렁이, 얼룩이, 점박이. 검둥이 밖에 없는 것 같다. 저녁 공양 후 보살님이 보름정도 같이 있었으면 하시면서, 일을 도와 달라고 하셨다. 법당, 관음전, 사시마지 올리기, 공양 준비 돕기이다.
‘몸이 아직 안 좋은데 할 수 있을까? 기도하면서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밤을 세웠다.
“뎅, 뎅뎅뎅, 뎅뎅뎅뎅뎅”
“보문아, 해 떴어야, 얼렁 나와”
“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보니,
“와~”
뾰얀 운해사이로 서서히 둥근 해가 얼굴을 내미는데, 하얀색 구름과 빠알간 해의 색깔이 너무나 선명하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장관이다.
공양 후, 보살님이랑 법당, 관음전, 후원 청소를 하고 나니, 한 무리의 등산객이 올라왔다. 울긋불긋, 시끌벅적, 하하 호호 탁 트인 전망과 맑은 하늘과 색색으로 물드는 나무들을 보면서 다들 즐거워했다. 등산객들은 내소사까지 넘어간다고 했다. 보살님은 등산객들 중 젊은 처사 몇 몇 분에게 감을 따 달라고 하셨다. 곶감을 만들어서, 등산객도 주고, 신도분도 주고, 절에 오시는 분들께 나눠 준다고 하셨다.
나는 관음전에 올라가서 108배를 하기로 했다. 천천히 일 배, 이 배, 삼 배…… 칠십 배까지 하고는 주저앉았다. 아직 몸이 안 나았는지 108배도 힘들다.
“부처님, 오늘은 이것만 하고 내일 다시 할께요.” 인사를 드리고 방에 와서 잠깐 졸았나 싶었는데 벌써 어둡다.
보살님이 공양간 마루에서 종을 치신다.
“뎅, 뎅뎅뎅, 뎅뎅뎅뎅뎅, 보문아 밥 묵자. 해가 다 졌당께”
“예 보살님, 깜빡 졸았어요”
보살님은 음식 솜씨가 좋으시다. 호박범벅, 텃밭에서 따 온 배추쌈, 된장국, 배추 겉절이 다 맛있다. “보문아, 낼 모레 손님이 와야, 창원에서 30명 정도 오는데, 내가 다 할텡께, 수저만 놔, 그라고 너는 들어가, 알았제?”
“예, 몇 시에 와요?”
“저녁 8시에 도착한당께, 밥은 해 줘야 쓰것제?”
“예”
뒷정리를 하고 바깥으로 나오니,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다. ‘월명이라…, 달이 아름다운 곳인가? 이름이 월명인가?’ 혼자서 중얼거려 본다.
다음날 아침, 보살님은 또 나를 깨우고, 진순이는 내 방 앞에서 짖는다.
“보문아, 해 떴다. 나와 봐”
아직 잠에서 덜 깬 나는 “어제 봤는데…, 더 잘랍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돌아누웠다.
하루종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텃밭에서 일하시고, 새벽예불도 혼자 하시고, 바느질도 하시고, 감도 깎고, 바쁘신 보살님과는 달리, 나는 대답만 “예”하고는 법당에서 반나절, 방에서 반나절, 절인지 집인지 구분 없이 지냈다.
드디어, 손님이 오는 날!
30인분의 음식은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차릴지를 의논했다.
“보살님, 배추쌈하고, 된장국, 보살님 잘 하시는 호박범벅, 묵은 김치, 배추 겉절이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너무 반찬이 없어서 괜찮것냐?”
“예, 산중 절에 채소밖에 더 있어요? 다 귀하잖아요.”
뷔폐식으로 차리기로 하고, 상을 다섯 개 붙여놓고 큰 접시 서른개와 수저를 놓고 반찬을 종류별로 담아놓고 방에 들어왔다. 갑자기 왁자지껄하더니, 삼삼오오 보살님들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잘 왔당께, 고생혔소. 얼렁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오소. 맛난 거 해 놨응께.”
“예, 고맙습니다.” 보살님들은 먼저 법당부터 들리는지 계단 올라가는 발소리가 쿵쿵거리며 크게 들렸다. 잠시 후 공양간은 보살님의 넉넉한 인심과 걸죽한 입담으로 화기애애하다 못해 왁자지껄하다. 보살님은 월명암의 유래와 부설거사에 대해서, 그리고 월명암 불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시는 것 같다.
다시 고즈넉한 산사,
‘똑똑똑똑’
목탁소리가 울리며, 30명의 기도소리가 깊어가는 가을밤을 수놓았다.
‘톡톡, 후두둑, 후두둑’
비가 온다. 밤사이 한 두 방울 내리더니, 아쉽게도 해 뜨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보살님들이 다 내려가셨다.
‘하루 종일 방에서 책이나 읽을까? 관음전에 좀 앉아 있을까?’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보문아, 언니 전화다. 얼렁 와”
“예”
월명암에는 핸드폰이 잘 안 터진다. 절로 전화를 걸었는가보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전화를 받으니, 무조건 집에 오란다. 이유는 말할 수 없고, 오늘 중으로 무조건 오라고만 한다. 전화를 끊고 나서 보살님께 말씀드리고, 그대로 하산했다.
부안에서 대전가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터미널에 앉아 있는데, TV화면에 설악산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이 막혔다고 한다.
‘설마, 10월 말인데 싶지만, 내 눈으로 화면을 똑똑히 본 이상 거짓은 아니다. 인제 겨울인가?’ 월명암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나는 가을을 느끼지 못했다. 눈 뜨면 보이는 파란하늘, 서서히 색깔이 빨갛게 물드는 나무들, 너무 쉽게 보고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가을을 놓쳤나 보다….
세상일도 다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항상 옆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는 친구나 가족처럼,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